​[목당 이활의 생애-78]정의의 힘 입증한 4·19 학생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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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8-03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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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78)

  • 제4장 재계활동 - (73) 4·19와 고대생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사태는 날로 악화될 뿐이요, 무슨 끝장을 보고야 말 조짐만 더 짙어 갔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뉴스위크지를 통해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허터 국무장관이 ‘한국의 정·부통령 선거 운동 중에 발생한 폭동사태에 개탄’의 뜻을 표명하고 양유찬(梁裕燦) 주미대사를 국무성으로 불러 ‘폭동 사건으로 자유당이 얻은 승리는 망쳐버리고 있다’고 경고했다는 기사를 읽고 있었다. 이런 때의 목당은 이승만(李承晩)의 정치가 못마땅한 것이 아니고 지도자로서의 이 박사에 대해 실망을 넘어 증오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 박사는 정치술수(政治術數)엔 노련할는지 몰라도 대립하는 세력을 아집과 독선으로 허용하지 않고 있는 인물이 아닌가. 덕활(德活)을 요구하는 동양정치론(東洋政治論)과 서구(西歐)의 의회(議會) 민주주의(民主主義)를 가슴으로 배워온 목당으로서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민주주의는 대화의 정치요, 토론의 정치인데 그는 대화도 토론도 거부하는 독재자였다. 독재하에서 민주주의의 덕성(德性)이라고 할 수 있는 영속성(永續性)과 순응성(順應性)을 어찌 기대할 수 있는가. 아부하는 추종자들과 부패만 만연할 뿐이 아닌가.

영국의 색슨 왕조(王朝)에서는 국왕은 자문회와 협력했고, 법률 제정에는 국내의 유력한 인물들의 찬동을 얻도록 애썼다. 그들의 후계자들도 이러한 제도를 이어받아 영국은 한 번도 절대군주(絶對君主) 제도를 경험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권의 교체가 있을 때마다 국왕 혹은 노련한 대신들이 국내 여러층의 신분·계급과 협의해 가면서 될 수 있는 한 그들을 포섭하여 유능한 성직자(聖職者)들이 장관의 자리를 맡았고 귀족과 경사(卿士, 삼정승 이외의 모든 벼슬아치를 통틀어 일컫는 말)는 국왕의 관리가 되었으며 촌읍(村邑)과 도시의 공민(公民)과 유지들은 국왕의 충실한 서민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성숙함에 따라 대영주(大領主)인 귀족·하급 귀족·소지주·상인·장인·소작농민도 차례로 정권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였으며 나중에는 노동당까지도 영예의 제1야당이 되었다가 정권을 담당하기에 이르지 않았던가.

이리하여 영국의 통치자는 계속해서 나타나는 잠재적인 불평분자들을 적극적인 협력자로 전환시킴으로써 정권의 안정과 더불어 확대된 모든 자유를 국민에게 허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민주주의 건국(建國)을 위해선 민주주의적인 집권자(執權者)의 등장이 바람직한 것인데, 이승만은 그런 그릇이 조금도 아니었다. 목당에게 비친 이승만은 옹졸한 소인배(小人輩)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기만을 내세우는 치졸을 목당은 혐오해 왔다.

데모는 선거가 끝나자 이번에는 ‘부정선거 다시하라’는 구호 아래 날로 더 치열해질 뿐이었다. 불똥은 서울로 튀어 고려대학(高麗大學)에까지 번지고 있었다. 4월 10일 마산의 경찰은 학생들의 데모 대열을 향해 마구 총격을 가하여 마침내 어린 고등학생 김주열(金朱烈)이 피살되었음이 드러났다. 며칠이 지나서 소이탄(燒夷彈, 사람이나 시가지·밀림·군사시설 등을 불태우기 위한 탄환류. 폭탄·총포탄·로켓탄·수류탄 등의 탄환류 속에 소이제를 넣은 것) 크기의 최루탄이 김주열의 한쪽 안공(眼孔, 눈구멍)을 뚫고 후두부(後頭部)까지 관통한 참혹한 사진이 공개되자 전국의 시민은 폭발하고 말았다.

고대신보(高大新報)의 ‘우리는 행동성이 결여된 기형적인 지성인(知性人)을 거부한다’는 사설은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했다. 정경대학 운영위원장 이세기(李世基) 학생을 비롯한 5개 대학 학생 간부들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4월 18일, 신입생 환영회의 날을 데모의 날로 정한 것이다. 시각은 정오였다. 시간 전에 “인촌(仁村) 동상 앞으로 모이라”는 신호가 오고 갔다. 오전 수업을 마친 학생들은 인촌 김성수(金性洙) 동상을 둘러싸고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간부들에 의하여 미리 마련된 흰 수건을 이마에 둘렀다. 그리고 거사(擧事)의 선언문(宣言文)을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그들은 일제히 스크랩을 짜고 데모에 들어갔다. 목표는 국회의사당이었다. 애국가와 교기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학생들은 교문을 나섰다.

목당은 유진오(兪鎭午) 총장을 통하여 고대 학생들이 데모에 들어가기 이틀 전인 4월 16일 고대학생회(高大學生會(단대별(單大別)) 운영위원장들이 모처에서 합숙을 해가면서 데모를 계획중이라는 정보도 들었다. 뿐만 아니라 주한(駐韓) 미국대사가 유 총장에게 참사관을 보내 사태 수습에 관한 의견을 물었을 때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하는 길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은 바 있었다.

교우회(校友會)로서도 학생들의 거사를 막을 아무런 명분이 없다는 그런 견해임을 목당은 미리 짐작했다. 자유·정의·진리를 고대의 전통과 교육이념으로 내세우고 전통적으로 기백을 자랑 삼는 고대생들이 불의(不義)에 항거하는 것을 당연한 사명으로 생각하고 뛰쳐나가는데 그것을 저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교수들의 생각이었다.

목당은 교문을 뛰쳐나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어느덧 상기하고 있었다.

“젊음이란 위대하고 빛난 것이다.(Fliech! Auf Hinaus ins weite Lans!)”

청춘은 너 자신의 날개를 믿고 미지의 넓은 세계를 향해 날아라! 목당은 어디에선가 보았던 한 구절을 소리내어 읊조렸다.

유 총장실에서는 몇몇 교수들과 함께 데모대의 상황 보고를 듣고 있었다. 지금 신설동 로터리에서 경찰과 충돌이 벌어졌다, 지금 동묘(東廟) 앞을 돌파하였다, 지금 동대문에서 또 충돌이 나서 여러 학생들이 경찰로 끌려갔다 등등 계속해 들어오는 전화보고를 받으며 모두들 가슴들을 죄었다.

학생들은 드디어 국회(현 서울시 의회)에 이르러 연좌 데모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 숫자가 시시각각으로 불어나 드디어 2000여 명에 이르렀다.

오후 3시에 마침내 내무부로부터 유 총장이 와서 사태를 수습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유 총장은 그러나 태도가 단호했다.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일어서는 총장을 따라 김순식(金洵植) 이하 그 자리에 있던 17~18명의 교수들이 우르르 따라 나섰다. 통근버스를 타고 일행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목당은 주무이사실(主務理事室)로 돌아왔다. 학생들의 안위(安危)를 걱정하여 흥분해 있는 교수들의 표정들이 지워지지 않았다.

목당은 새삼 이 나라의 명맥이 교수와 학생들에 의해 보장되고 있음을 재확인하는 느낌이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총장 일행이 국회 앞에 다다르자 학생들은 일제히 박수로 맞았다는 것이었고, 마이크 앞에 선 유 총장은,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여 일어설 용기를 제군들이 가진 것을 총장으로서 기뻐한다”고 첫 서두를 뗐다는 것이며, 이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제 부정과 불의를 제거하려는 제군들의 의사는 충분히 표명되었으나 그만 학교로 돌아가자. 날은 이미 저물어 가는데 더 이상 큰길을 점령하고 온 장안의 교통을 마비시킬 수도 없지 않은가·····.”

학생들은 총장의 말을 듣기는 하면서도 좀체로 해산하려 하지 않고, 구속된 학생들을 전원 석방하여야 해산하겠다는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유 총장은 곧 그렇게 할 것을 약속하고 시경국장과 담판하여 약속을 받고 통근버스로 종로서와 동대문서를 돌아다니며 구속학생들을 인수해 국회 앞으로 돌아와 학생들에게 학교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자 그제서야 학생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학교로 돌아온 총장은 경과를 이야기하면서 안심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이날 집으로 돌아온 목당은 반주로 나온 술을 들며 그날 있었던 일을 아내한테 들려주며 자기의 일인 양 흥분했다.

“훌륭한 총장 밑에 훌륭한 학생이 있는 법이야.”

이날 목당에게 비친 유 총장은 위대한 교직자요, 나폴레옹 군대를 앞에 놓고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뛰어난 연설을 한 철학자(哲學者) 피히테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조간신문은 뜻밖에도 놀라운 보도를 하고 있었다. 경찰 백차의 인도를 받고 학교로 돌아오던 대열이 을지로 4가에서 종로 4가 쪽으로 접어드는 순간 쇠뭉치와 갈쿠리 등의 흉기를 든 40여명의 깡패들이 나타나 학생들을 상대로 무차별 난타를 가해 왔으나 경찰은 그들을 막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가. 경찰 백차가 깡패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학생들이 탄 버스를 유도한 것임에 틀림없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고려대생이 중상 혹은 경상을 입는 사태가 빚어졌던 것이다.

이튿날 즉 4월 19일, 온 장안의 학생들이 벌떼같이 일어나고 시민까지 합세하여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 봉기(民衆 蜂起)가 일어나 드디어 정권이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전날 밤 고대생 피습(高大生 皮襲) 사건만 없었더라도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나, 깡패 정치는 기어코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빚어내고 말았던 것이다.

학생들은 경무대를 향하여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고대생들도 또 나섰다. 2000명, 3000명, 1만 명, 2만 명. 거리는 학생들의 물결로 메워졌다. 데모대(隊)는 국회와 경무대를 향하여 노도와 같이 밀려갔다.

경무대 쪽은 중앙청 앞에서부터 첩첩이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무장경찰은 학생들을 향해 총구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데모대에 최루탄을 쏘고 소방차로 물세례를 퍼부었다. 학생들은 돌과 벽돌로 대항했다. 이제 데모는 하나의 전투로 화하여 분노한 군중은 바리케이드를 하나둘 허물어뜨렸다.

정부에서는 버티다 못해 오후 7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선포했으며 그 이전에 벌써 학생들을 향한 실탄사격이 자행되었다. 학생들은 선혈을 쏟으며 쓰러졌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은 수도관으로 엄폐하기까지 하면서 경무대로 육박해왔다. 그들을 향해 결찰과 헌병대가 사격을 가했다. 학생들은 스러지고 또 쓰러졌다. 소방차를 빼앗아 탄 학생들이 거리를 질주했다. 내무부에서는 달리는 차에까지 총질을 가했다.

데모대는 파출소를 파괴하고 어용신문(御用新聞)인 서울신문사를 불질렀다. 쓰러진 동료를 떠메고 정부를 규탄하면서 거리를 휩쓸었다. 서울의 치안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데모대를 수습하기 위하여 군(軍)이 출동하였고 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계엄령 속에서 25일에는 교수(敎授) 데모가 행해졌다. 서울대학교 의대(醫大) 강당에 모인 각 대학 교수들은 정부를 규탄하는 시국선언문(時局宣言文)을 채택하고 데모에 들어간 것이다.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교수들은 국회로 향하였다. 거리엔 시민들이 또다시 모여들었다 교수 데모에 이어 시민들의 데모가 행하여졌다. 군인과 탱크는 묵묵히 군중을 지켜보기만 했다. 데모의 물결은 밤을 새웠고 공포의 총성은 그칠 사이 없었다. 새벽이 되면서 군중들은 더욱더 많은 숫자로 거리를 메웠고 정부를 규탄하고 독재자를 규탄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어쩔 수 없이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그는 하야(下野)할 것을 성명한 것이다. 독재정치는 끝이 났다. 4월 26일이었다. 고대생이 앞장선 서울에서의 학생혁명(學生革命)은 일단 성공하였다.

고려대학교는 이 학생혁명으로 많은 희생자를 냈고 희생자 가운데는 두부(頭部) 중상으로 그 후 2, 3년간이나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던 학생도 있었지만, 그 사건으로 직접 생명을 잃은 학생이 없었던 것은 다행이었다고 할까.

4·19 학생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교육계에도 선풍이 불어 전국 각급 학교 책임자들은 대부분 경질되었지만 대학총장 가운데 유 총장만은 그대로 남았다.

목당은 자랑스러웠다. 유 총장이 자랑스러웠고 고대생들이 자랑스러웠다. 인촌이 살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보람을 느꼈을까 생각하는 것이었다.

목당은 4·19 학생혁명을 통해 정의의 힘을 보았다. 그리고 불의의 말로(末路)를 보았다. 병원을 돌며 부상 입은 학생들을 찾아 위로했다.

12년 전 신생 민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6·25의 국난(國難)을 겪고 독선이니 독재니 부패니 부정이니 불법이니 하여 온갖 지탄을 받으면서도 권좌(權座)에 집착하던 노독재자(老獨裁者)도 마침내는 민중 봉기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는 경무대를 떠나면서도 유훈(遺訓) 한 마디는 잊지 않았다.

“불의를 보고도 일어나지 않는 국민은 죽은 국민이다.”

목당은 이 일구(一句)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 것인가 생각하고 생각했다. 이것은 진리이기도 했지만, 이승만 특유의 능청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박사가 경무대를 떠나던 4월 28일 새벽, 경무대 별관 경비실 옆에 있는, 대통령 여비서가 거처하는 곳에서 이기붕은 그의 부인 박마리아와 차남 강욱(康旭)과 함께 그의 장자(長子)이며 이 박사의 양자인 강석(康石)이 쏜 총탄을 맞고 일가족 4명이 유서 한 통 없이 자결했다. 분수없는 욕망이 가져온 파멸이요, 권세욕(權勢慾)에 이끌린 소인배들의 말로를 목당은 여기에서 보았다.

목당은 다시는 소인배가 권좌에 앉는 일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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