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문화기행>가중호걸(歌中豪傑) 명창 권삼득의 향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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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12-19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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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최규온 기자 =전북 전주시내 교통안내표지판에는 유독 사람 이름이 들어간 게 눈에 많이 띈다. 올 1월1일부터 주소지에 도로명 주소가 전면 사용되면서 변화된 현상이다.

전주시는 가장 한국적인 도시미관을 살린 도로명 안내표지판으로 교체한다는 데 역점을 뒀다. 태조로, 견훤로, 정여립로, 권삼득로, 호성로, 추탄로, 운암로, 서귀로 등 전주시내에는 역사적인 인물을 딴 길 이름이 유독 많다.

전주가 역사와 전통의 고장이라는 정체성 찾기에 초점을 맞춘 탓이다. 그 중 하나가 ‘권삼득로(路)’다. 권삼득로는 전주가 ‘판소리 고장’임을 일깨워 준다.

조선시대 명창 권삼득(權三得·1772~1841)을 기리기 위해 새 주소지 사업을 계기로 붙여진 도로명이다. 권삼득로는 옛 ‘남북로(南北路)’다.

향토사학자, 국어학자, 지역토박이 지식인 등이 모여 1년여의 조사와 논의를 거쳐 개명했다. 다른 지역 도로 개명 작업이 한 달 정도 걸린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그만큼 전주가 전통과 양반의 고장이라는 정체성을 십분 고려했기 때문이다.

평소 무심히 지나쳤던 길도 의미나 유례 등을 알고 나면 좀 더 새롭게 다가올 수 있다.

전주시 권삼득로는 전주고등학교 앞에서 시작돼 옛 KBS전주방송총국~금암초등학교~전북은행 본점~전북대 구정문~덕진공원~전북도립국악원을 지나 과거 부자동네로 알려진 호반촌에서 끝을 맺는다.

기린로와 양 축을 이룬 채 전주 동부지역 남과 북을 가르며 총 길이는 4.6km에 이른다. 2차선의 권삼득로 전반부는 주거지와 상가 등이 뒤섞여 여느 구도심 길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이렇다할 특징도 없는 옛 시가지 모습의 전형이다.

그러나 전북은행 본점 4거리를 지나 전북대 교정을 끼고 서쪽으로 들어서면 전혀 다른 길로 변한다. 전북대 옛 정문 앞에는 전주의 대학로로 일컫는 ‘명륜길’이 젊음과 열정을 내뿜는다. 곁들여 삼성문화예술회관, 전북대박물관, 덕진공원, 전북도립국악원, 덕진예술회관, 도립문학관 등 교육과 문화·예술공연시설들이 촘촘히 포진해 있다.

전북도립국악원에 설치된 조선 8대 명창 권삼득 기적비[사진=최규온기자]


전북도립국악원 입구에는 한 시대를 걸쭉하게 풍미한 가중호걸(歌中豪傑)의 명창 권삼득의 공적을 기리는 ‘권삼득 기적비가 꼿꼿하게 서 있다. 기적비(紀積碑)는 판소리 때 장단을 맞추는 북 모양을 돌로 조각해 만들어졌다.

-조선 중기 전설적인 판소리 8대 명창
권삼득은 조선 중기 무렵의 전설적인 판소리 꾼으로 판소리 8대 명창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삼득(三得)’이라는 이름은 정조로부터 하사 받은 귀하디귀한 이름이다. 정조는 그에게 새·짐승·사람소리를 모두 얻었다 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삼득 명창이 ‘새타령’을 부르면 인근 숲 속에서 새가 날아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소리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만하다.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권삼득은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질이 워낙 뛰어난지라 글 배우기를 멀리한 채 소리꾼들을 찾아다니며 소리 배우기에만 전념했다.

당시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안동 권씨’ 집안 자제가 상것들이나 하는 소리를 한다는 게 어디 상상이나 할 법한 노릇인가.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그의 가문에서는 양반 가문의 치욕이라 여겨 그를 죽이기로 하고 멍석말이를 할 참이었다. 이때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난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소리나 한 번 하게 해 주십시요!”
판소리 한 가락을 부른 뒤 최후를 마치고 싶다는 삼득의 애절한 마음을 차마 저 버릴 수는 없었던지 그것만은 허락했다.

풍전등화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 삼득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춘향가 중 ‘십장가’ 대목을 뽑아들었다. 십장가는 관청의 옥에 갇힌 춘향이가 매를 맞으면서 그 숫자에 맞춰 자신의 절개를 읊은 곡이다. 십장가를 통해 삼득은 자신의 모질고 기구한 신세를 표출하고자 했음일까.

선곡도 당시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거적 아래에서 들쳐 나오는 절절하고 통절한 소리는 단숨에 듣는 이들의 애간장을 녹여버릴 듯 했다. 그의 비장한 소리는 바위처럼 단단한 가문 어른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고 말았다.

그렇게 삼득은 구사일생으로 몸숨을 부지했다. 죽음을 면한 대신 족보에서 제명당하고 가문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한바탕 소용돌이는 마무리 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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