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 BIZ] 인플레 시대 맞은 일본…가계는 아직 웃지 못한다

  • 인건비 반영한 가격 인상 일상화…기업 실적은 5년 연속 최대

  • 실질임금 회복은 더뎌…중소기업은 비용 부담에 임금 격차 확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난달 중순 도쿄에 거주하는 한 회사원(49·남)은 야근을 마친 후 허기를 달래려 유명 카레 전문점을 오랜만에 찾았다. 평소대로 돼지고기 샤브 카레에 소시지 2개, 야채, 삶은 달걀을 추가했다. 시저샐러드까지. 그런데 주문 태블릿을 본 순간 이 남성은 깜짝 놀랐다.

"응? 2000엔(약 1만7000원)이 넘네?"

이 가게에서 주문 금액이 2000엔을 넘은 것은 처음이었다. 과감하게 소시지를 포기하고 1800엔대로 맞춰 주문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소한 '심야요금' 130엔이 가산됐다. 총 1992엔. 남성은 "마음 놓고 토핑을 추가하던 시절도 이제 끝났나"며 아쉬워했다.

남성의 지갑에서 130엔을 더 가져간 '심야요금'은 밤 시간대 주문가격에 7%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지난 9월 새로 도입됐다. 가게는 이때 토핑 12종의 가격도 평균 17% 올렸다. 운영사 사장은 가격 인상 이유에 대해 "거래처들도 줄줄이 값을 올리고 있고, 인건비도 크게 올랐다. 어쩔 수 없이 우리도 심야요금을 신설했다"고 밝혔다.

 

인건비 상승

별것 아닌 듯한 이 130엔에는 지금 일본 경제의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본은 1990년대 후반부터 30년 가까이 물가가 좀처럼 오르지 않는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의 나라였다. 기업들은 손님이 떠날까 두려워 원가가 올라도 웬만하면 가격은 올리지 않았다. 직원 월급을 올려주더라도 그 부담은 회사가 알아서 떠안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이제는 "인건비가 올랐으니 값을 올리겠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통한다.

신용조사업체 데이코쿠데이터뱅크에 따르면 가격을 올린 식품 가운데 인건비를 인상 이유로 든 품목의 비중은 2023년 1월 10%에 불과했다. 올해 1월에는 66%까지 늘었다. 값이 오른 식품 세 개 중 두 개꼴로 '인건비'가 인상 이유에 올라 있다는 얘기다. 물가가 오르지 않기로 유명했던 나라가 본격적인 인플레이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사실 이는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이 오랫동안 바라던 모습이기도 하다. 일본은행은 2013년부터 막대한 돈을 풀며 '물가 상승률 2%'를 목표로 내걸었다. 물가가 오른다는 건 기업들이 상품 가격을 올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업이 가격을 올려 수익을 확보하면 직원들의 임금도 올려줄 수 있다. 월급이 오른 가계는 다시 지갑을 열고, 소비가 늘면 기업의 수익도 다시 늘어난다. 이렇게 물가와 임금이 함께 오르며 경제가 돌아가는 '선순환'을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일본은행은 지난달 30일 일시적인 변동 요인을 제외한 기조적 물가 상승률이 "2% 목표와 대체로 부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2013년 목표를 내건 지 13년 만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바라던 인플레이션을 맞은 일본인들은 지금 웃고 있을까.

일단 기업들의 표정은 나쁘지 않다. 값을 올려도 생각만큼 손님이 줄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나가사키 짬뽕 체인 링거헛은 올해 2월 대표 메뉴인 짬뽕 가격을 40엔 올렸다. 전년에도 40엔을 올렸던 터라 회사는 상반기 손님이 2.4%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0.4% 늘었다. 링거헛 사장은 "손님들이 '가격 인상'이라는 말에 익숙해진 것 같다"고 했다. 한 대형 의류업체 사장은 "업계 다른 회사들도 다 올리고 있다. 다 같이 올리면 무섭지 않다"고 털어놨다. 이처럼 비용을 가격에 전가하는 움직임이 확산하는 가운데, 일본 상장사들의 순이익 합계는 5년 연속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가계·중기 부담 증가

하지만 가계의 사정은 다르다. 도쿄 후추시에 사는 한 63세 주부는 장을 볼 때 특가 정육점과 할인 슈퍼, 가장 싼 동네 청과점까지 가게 여섯 곳을 돌아다닌다. 그렇게 아껴도 일주일에 1만엔 정도였던 식비는 1만5000엔까지 늘었다. 자영업을 하는 남편의 수입도 늘긴 했지만 물가가 오르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는 "값이 오를 때마다 가계가 휘청거린다. 서민들은 감당하기 어렵다"며 한숨을 쉬었다.

중소기업의 표정은 더 어둡다. 한 금속 제조업체 담당자는 "물건이 소비자에게 닿기까지 어딘가에서 중소기업이 비용을 떠안고 있다"고 토로했다. 중소기업들은 원가가 올라도 거래처에 값을 올려달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일본 중소기업청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이 늘어난 비용 가운데 실제로 거래 가격에 반영한 비율은 올해 3월 기준 54.2%에 그쳤다. 오른 비용의 절반 가까이는 회사가 떠안고 있다는 뜻이다.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니 직원 월급을 올려줄 여력도 부족하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대기업(직원 1000명 이상)의 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소기업(10~99명) 임금은 2021년 82.4에서 지난해 79.4로 떨어졌다. 인플레이션이 오히려 대기업과 중소기업 직원 사이의 임금 격차를 벌려놓은 것이다.

같은 인플레이션을 겪는데 왜 이렇게 표정이 엇갈릴까.

답은 월급에 있다. 물론 일본 직장인들의 월급도 오르고 있다. 물가 상승분을 빼고 계산한 '실질임금'은 올해 들어 8개월 연속 1년 전보다 늘었다. 하지만 이는 작년보다 조금 나아졌다는 뜻일 뿐이다. 실질임금은 2022년부터 4년 연속 줄었는데, 그동안 잃어버린 몫을 아직 다 되찾지 못했다. 니세이기초연구소의 계산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이 시작되기 전인 2021년의 실질임금을 100으로 놓았을 때 지난해 초에는 94.1까지 떨어졌고, 최근에도 96.7에 머물러 있다. 월급으로 살 수 있는 물건과 서비스가 5년 전보다 여전히 3%가량 적다는 얘기다. 실질임금이 해마다 1% 정도씩 꾸준히 오른다고 가정해도 2021년 수준을 되찾는 건 2029년 말쯤이다.

월급이 좀처럼 물가를 따라잡지 못하는 데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이토 마코토 고쿠가쿠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임금을 올렸으면 그만큼 값을 올려도 된다'며 경영자들에게 면죄부를 줬다고 비판한다. 임금 인상에 드는 돈을 가격 인상으로 메우면, 그 부담은 결국 소비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카레 가게의 130엔도 결국 손님의 지갑에서 나왔다. 사이토 교수는 "모든 기업이 그렇게 하면 물가도 임금만큼, 혹은 그 이상 오른다. 실질임금이 오를 리 없다"고 말했다.
 

물가 상승 지속 전망

걱정스러운 건 물가가 앞으로 더 오를 수 있다는 점이다. 9월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신선식품 제외)은 2.1%로 겉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바야시 신이치로 미쓰비시UFJ리서치&컨설팅 수석연구원은 정부의 휘발유 보조금 같은 정책 효과로 눌려 있는 숫자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올해 2월 중동 정세가 악화되면서 치솟은 국제 유가의 영향이 식품 포장 용기나 페트병, 건축 자재 같은 제품으로 번지면 물가 상승률이 3% 가까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내년 봄부터 식료품 소비세를 낮춰 부담을 덜어줄 계획이지만, 고바야시 연구원은 효과에 회의적이다. "가격이 잠깐 내려가더라도 소비자들은 언젠가 다시 오를 거라고 생각해 지갑을 쉽게 열지 않을 겁니다."

일본은 30년 만에 값을 올리는 법을 배웠다. 기업들은 이제 인건비가 오르면 가격을 올리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선순환의 나머지 절반, 즉 오른 가격만큼 월급이 오르고 가계가 다시 마음 놓고 지갑을 여는 단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카레 가게의 그 회사원이 다시 마음 편히 소시지를 얹을 수 있을 때, 일본이 바라던 선순환도 비로소 생활 속에 자리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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