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20초 남짓 스치는 아찔한 톰 크루즈의 낙하 장면. 이 짧은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현장에는 무려 7대의 카메최근 영화계의 이목이 쏠린 나홍진 감독의 신작 '호프(HOPE)'.
이 작품의 액션 파트 특수촬영을 총괄한 인물은 할리우드에서 뼈가 굵은 특수촬영 장인이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서 톰 크루즈의 절벽 낙하 장면에 투입된 카메라 7대 중 6대를 책임졌던 스티븐 오 XM2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한국계 호주인으로 세계 무대를 누비고 있는 그를 방한 일정 중 부산에서 만났다.
할리우드 명장면 뒤의 기술...‘호프’까지 이어진 특수촬영 혁신
오 대표가 인터뷰 중 가장 오랜 시간을 할애해 설명한 것은 단연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파트 원’의 절벽 점프 신이었다. 톰 크루즈가 오토바이를 탄 채 절벽 꼭대기에서 수직 낙하하는 이 장면은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으로 꼽힌다.
기존 장비로는 톰 크루즈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도, 절벽의 강한 돌풍을 견딜 수도 없었다.
오 대표는 “일반 드론으로는 불가능한 조건이어서 오직 그 장면만을 위한 맞춤형 드론을 새로 제작했다”고 밝혔다.
그가 촬영용 장비를 직접 설계하고 만들기 시작한 것은 십수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시중의 드론은 손바닥만 한 크기에 소형 카메라를 겨우 매다는 수준이었다. 무거운 영화용 카메라를 실을 기체가 전무하자 그는 직접 25㎏급 기체 설계에 나섰다. 탄소섬유 프로펠러를 구할 수 없어 나무를 깎아 만들었고, 금속 부품도 직접 절삭해 완성했다.
본격적인 계기는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의 호주 촬영 당시 찾아왔다. 촬영감독이 기존 장비의 한계를 지적하며 거부하자, 오 대표는 “3주 안에 안 되면 없던 일로 하겠다”는 조건으로 개발에 착수했다.
2주 반 만에 첫 기체를 띄웠으나 시험비행 중 추락해 전소하는 아픔도 겪었다. 하지만 여분으로 만들어 둔 두 번째 기체를 곧바로 투입해 6개월간의 촬영을 무사히 마쳤다.
현재 XM2의 기체는 100㎏급까지 진화했다. 디지털 시네마 카메라 중에서도 무거운 축에 속하는 ‘알렉사 65’를 실을 수 있는 수준으로, 홍경표 촬영감독의 요청으로 영화 ‘하얼빈’의 몽골 고비사막 촬영에도 투입된 바 있다.
XM2의 기술력은 영화 밖 재난 현장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광섬유 케이블로 지상과 연결한 유선 드론은 120m 상공에서 2~3주간 체공하며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다.
이 장비는 지진이나 산불 등으로 통신망이 완전히 끊긴 지역에서 ‘임시 기지국’ 역할을 하며, 현재 미국 주요 통신사인 버라이즌(Verizon) 등에서 운용 중이다.
대형 재난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붕괴하는 것이 전기와 통신망이다. 기지국이 파괴되면 구조를 요청할 수도, 가족에게 생사를 알릴 수도 없다.
오 대표는 "다쳤을 때 가족에게 '괜찮다'는 말 한마디를 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엄청난 차이를 만드는 기술"이라고 강조했다. 고립된 부상자가 직접 자신의 상태를 알릴 수 있게 되면, 구조대의 골든타임 확보와 우선순위 결정에도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강력한 조명을 달아 야간 구조 현장을 밝히는 용도로도 쓰인다. 배터리 교체를 위해 내려올 필요가 없어 밤새 한자리를 비출 수 있다.
나홍진 '호프'로 7개월 호흡..."한국 영화, '수준' 아닌 '맛'의 변화"
최근에는 나홍진 감독의 ‘호프’에서 액션 파트 촬영을 전담하며 제주, 해남, 합천, 루마니아를 오가는 7개월의 대장정을 마쳤다. 스테디캠, 크레인, 와이어 촬영을 직접 지휘했으며 이 작품만을 위한 전용 장비도 새롭게 제작했다.
그는 최근 한국 영화의 변화를 묻는 질문에 “수준이 올라간 것이 아니라 ‘맛’이 바뀐 것”이라는 흥미로운 진단을 내놨다. “원래도 훌륭했지만, 새로운 조리법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라는 것.
영상도시 부산에 대해서도 “부족한 것은 없지만, 결과물들이 다소 비슷비슷해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며 “‘호프’ 같은 작품이 그 지점에 새로운 변화를 줬다”고 평가했다.
부러진 발목이 바꾼 인생...서울 거점으로 할리우드 대작 유치 시동
세계적인 특수촬영 전문가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의 출발점은 영화가 아니었다. 태권도 사범이던 아버지를 따라 호주에서 자란 그는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공학도였다.인생의 변곡점은 대학교 2학년 때 찾아왔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다 스키점프 중 추락해 오른쪽 발목이 산산조각 나는 중상을 입었다. 네 차례의 수술과 8개월의 깁스 생활, 독한 진통제 부작용으로 머리카락까지 모두 빠졌다. 의사로부터 “다시는 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도 들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재활을 위해 찾은 한국에서 우연히 통역과 운전 일을 하던 중 한 광고 촬영 현장과 인연이 닿았다. 촬영 허가가 나지 않아 스태프들이 장비를 손으로 나르며 고생하던 상황에서 그가 직접 관리자를 설득해 허가를 받아낸 것이다. 이 과정을 눈여겨본 촬영감독의 권유로 그는 영상 업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발목이 부러지고 머리가 빠졌던 그 좌절의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덤덤히 회고했다.
현재 XM2는 22명 규모로 운영되며, 5명 안팎의 3개 팀이 전 세계 현장을 누비고 있다. 멜버른 본사를 비롯해 로스앤젤레스, 런던 등에 거점을 두고 있으며 최근에는 서울에도 사무실을 열었다. 현재도 캐나다와 영국에서 각각 다른 작품의 촬영이 진행 중이다.
‘호프’ 참여 이후 국내 영화계의 러브콜이 이어지면서 한국 활동 비중도 점차 커지고 있다. 오 대표는 프로듀싱(제작)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할 계획이다.
그는 “촬영의 A부터 Z까지 모든 노하우를 알고 있기에 제작까지 아우르는 ‘원스톱 숍(One-stop shop)’이 가능하다”며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할리우드 대작 몇 편을 한국으로 유치하게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전 세계를 누비는 일정 속에서도 “시차라는 걸 믿지 않는다”며 특유의 에너지를 과시한 그는 이번 부산 방문 중 광안리 수변공원 인근의 한 돼지국밥집에서 앞선 24팀을 기다리며 45분간 줄을 선 일화를 웃으며 털어놨다. “국밥은 다 똑같은 국밥일 줄 알았는데 확실히 다르더라”며 한국에 대한 애정도 드러냈다.
방한 일정 중 ‘2026 코스타 월드 인 부산’에서 ‘LIFE & FAITH’를 주제로 강연을 마친 오 대표의 다음 행선지는 로스앤젤레스다. 부산에서 다시 태평양을 건너는 그의 여정은 새로운 촬영 기술을 향한 도전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빠르게 진화하는 영상 산업의 최전선에서 그가 또 어떤 장비와 기술로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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