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가입이 있었기에 중국은 톈안먼(天安門) 사태와 물가파동으로 얼룩진 경제 고통을 완전히 떨쳐내고, 이후 20년 넘게 이어진 초고속 성장의 문을 열 수 있었다. 1989년 톈안먼 사태로 서방의 제재와 외면 속에 고립됐던 중국 경제는 1990년대 들어 또 다른 위기를 맞았다. 물가가 20%를 넘나드는 물가파동이 덮치며 개혁개방의 성과 자체가 흔들렸다. 이 불길을 잡은 인물이 바로 주룽지였다.
경제기획 분야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88년 상하이(上海) 시장에 올랐고, 덩샤오핑(鄧小平)과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신임 속에 1991년 부총리, 1993년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다. 부총리 시절 강력한 긴축과 금융 통제로 살인적인 물가를 잡아내며 전 중국의 신뢰를 얻었다.
1998년 총리에 오른 주룽지가 가장 먼저 붙든 과제가 WTO 가입이었다. 당시 중국은 높은 관세와 각종 비관세 장벽으로 자국 시장을 강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또한 중국산 제품을 타국에 수출할 때도 높은 관세율이 적용됐다. 외국 기업의 중국 진출을 막는 규제들도 겹겹이 쌓여 있었다. 당시 중국의 관세 장벽은 40%를 웃돌았고, 국유기업은 시장 경쟁을 겪어본 적이 없었으며, 금융업은 외국 자본에 문을 걸어 잠근 채였다. 이 모든 것을 뜯어고쳐야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중국의 WTO 가입에 동의할 상황이었다.
외부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주룽지는 1999년 4월 워싱턴을 찾아 미국과 양자협상을 타결했지만, 한 달 뒤 나토군의 유고슬라비아(현재 세르비아) 중국대사관 오폭 사건으로 미중 관계가 얼어붙으면서 가입 절차는 고비를 맞았다.
그럼에도 이 작업들이 속전속결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은 주룽지의 장악력과 카리스마 , 그리고 그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 덕분이었다. 반대 세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밀어붙이는 결단력, 실무를 꿰뚫는 전문성, 그리고 중국이 세계 경제 질서 안으로 들어가야만 살아남는다는 흔들림 없는 신념이 없었다면 국유기업 개혁도 금융 개방도 관세 인하도 중도에 흐지부지되거나 좌초했을 가능성이 크다.
수출은 폭증했고 외환보유고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톈안먼 사태와 물가 파동의 그림자는 초고속 성장의 열기 속에 빠르게 지워졌다. 중국 제조업의 경쟁력도 비약적으로 강화됐다. 외국 기업들이 밀물처럼 중국에 밀려들면서 이들의 노하우가 고스란히 중국에 전수됐다. 또한 외국 기업의 물결은 중국의 시장화 개혁을 추동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다져진 제조업 기반은 이후 스마트폰과 전기차, 배터리 산업의 세계 1위 생산국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알리바바, 텐센트, 화웨이 같은 IT 기업의 성장으로 이어졌고, 다시 딥시크 같은 AI 기업이 등장할 수 있는 산업적 토양이 됐다.
오늘날 미국과 자웅을 겨루는 미중 경쟁의 밑바닥에는 주룽지가 깔아 놓은 WTO 가입이라는 반석이 놓여 있다. 한 시대의 개혁가가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가 온몸으로 밀어붙였던 개방의 물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이 세계 경제의 패권을 놓고 맞서는 순간에도, 그 경쟁의 출발점에는 25년 전 주룽지가 열어젖힌 WTO라는 문이 놓여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르포] 중력 6배에 짓눌려 기절 직전…전투기 조종사 비행환경 적응훈련(영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02/29/20240229181518601151_258_16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