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는 원칙보다 국익이 먼저다. 최근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우라늄 농축 허용을 포함한 원자력 협력을 확대하는 움직임은 이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핵 비확산을 국제질서의 핵심 원칙으로 강조해 온 미국이 상업용 원전 한 기 없는 사우디와 원자력 협력의 문을 넓히는 것은 단순한 에너지 정책이 아니다. 중국의 중동 영향력을 견제하고, 사우디를 미국 중심 안보 질서에 묶어두려는 전략적 선택이다. 비확산 원칙보다 지정학적 이해가 앞선 행태다.
한국은 1970년대 박정희 정부 시절 핵무장 논란 이후 반세기 넘게 미국이 주도하는 핵 비확산 체제를 성실히 지켜왔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충실히 이행했고, 한미 원자력협정에 따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 등 핵연료 주기 기술에서도 적지 않은 제약을 감수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설계·건설·운영 능력을 갖추고도 동맹의 신뢰를 우선하며 스스로 행동의 범위를 제한해 온 것이다.
한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원전 강국으로 성장했다.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을 성공적으로 준공했고, 유럽 신규 원전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입증하고 있다. 50년이 넘는 원전 운영 경험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인정하는 투명한 안전관리 체계는 우리 원전 산업의 가장 큰 자산이다.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모범적인 비확산 국가라는 평가를 받아온 이유다.
사우디는 아직 원전 운영 경험이 없고, 핵무장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으로 국제사회의 우려를 산 적도 있다. 그럼에도 미국은 중국 견제와 중동 질서 재편이라는 전략적 필요 앞에서 원자력 협력의 문을 넓히고 있다. 특히 중국이 원전과 인프라를 앞세워 중동 영향력을 확대하는 상황에서 사우디를 놓칠 수 없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미국 입장에서 현실적인 선택이지만 분명해진 사실은 국제정치가 원칙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익이 걸리면 원칙도 해석도 달라진다.
이번 변화는 안보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함의를 던진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고도화하는 상황에서 원자력 추진 잠수함 확보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원잠은 핵무기가 아니라 장기간 잠항과 원거리 작전이 가능한 전략 자산이다. 국제 비확산 체제와 한미 동맹을 존중하는 범위 안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지만 미국이 사우디에는 유연한 접근을 시도하면서 한국에만 과거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비확산 원칙을 준수하는 것과 시대 변화에도 과도한 제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동안 쌓아온 신뢰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에 걸맞은 합리적 대우를 요구해야 한다. 한미 원자력협정의 운용 방식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동맹은 일방의 희생 위에서 지속되지 않는다. 미국이 국익에 따라 원칙을 유연하게 적용한다면 한국 역시 국익을 중심에 둔 원자력 전략을 보다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동맹의 모습이며, 급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현실적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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