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전기산업의 대전환 시대, 구심점이 필요하다

노용호 대한전기산업연합회 상근부회장
노용호 대한전기산업연합회 상근부회장.
지난 6월 29일, 정부는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를 세 축으로 삼아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눈길을 끈 것은 수천조원대에 달하는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 규모뿐만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구상을 실제로 움직이는 필수 요소로 전기가 함께 거론됐다는 점이다. 반도체 팹이든 AI 데이터센터든 가동에 필요한 전력량은 원전 수십 기를 합친 규모에 달한다. 투자 계획이 아무리 웅장해도 전기가 적기에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않으면 청사진에 머물 뿐이다. 정부 역시 메가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전력 인프라 확충을 최우선 지원 과제로 내세웠다.

전기 수요의 폭증은 메가프로젝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산업 전반의 전기화가 맞물리면서 국가 전력 수요는 역대 어느 때보다 빠르게 늘고 있다. 정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GW 조기 달성, 원전과 소형모듈원전(SMR) 활용, 에너지저장장치(ESS) 확대, 전력망 선제 구축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탈탄소, 그리고 전력을 생산한 지역에서 소비하는 지산지소(地産地消)를 위한 방향은 맞다. 그러나 방향이 맞다고 해서 자동으로 실행되지는 않는다. 에너지 공급의 안정성 확보, 대규모 송전망 구축,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할 기술인력 양성 등 전기산업이 실제로 풀어야 할 과제들은 여전히 산적해 있다.

전기가 더 이상 산업을 뒷받침하는 인프라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경제 성장 자체를 좌우하는 핵심 자산이 된 시대. 전력산업계에서는 이를 '일렉코노미(Eleconomy)', 전기(Electricity)와 경제(Economy)가 하나로 얽힌 시대라 부른다. 지금 우리가 현장에서 마주하는 현실이 그렇다.

바로 이런 시기일수록 전기산업계 전체가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플랫폼, 정책과 현장 사이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다. 정부가 정책 방향을 제시하더라도 산업 현장의 목소리가 제때 모이지 않으면 실행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기업은 투자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는 제도를 원하고, 발전사와 기자재·시공 업계는 현장에서 적용 가능한 기준과 지원 체계를 필요로 한다. 학계와 연구기관은 미래 기술을 준비하고, 정부는 국가 전체의 전력 수급과 산업 경쟁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전기산업은 여러 주체의 이해와 역할이 맞물려 움직인다. 각자의 목소리를 따로 내는 데 그쳐서는 대전환의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산업계의 의견을 모으고, 현장의 과제를 모으고, 이를 정책으로 연결할 수 있는 중심축이 필요한 이유다.

대한전기산업연합회의 출범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대한 응답이다. 60년 역사의 대한전기협회가 새롭게 제정된 '전기산업발전기본법'을 기반으로 2026년 4월 대폭 혁신된 체계와 역할을 갖추고 새롭게 출발했다.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전기산업계 대표 플랫폼으로 스스로를 재정비한 것이다.

연합회가 맡은 역할은 분명하다. 발전·송배전·전기설비·기자재·시공 등 업종별로 흩어져 있던 산업계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정부에 정책과제로 제안하고, 제도 개선과 지원사업 발굴에 힘을 싣는 것이다. 대한전기협회 시절 쌓아온 전기설비기술기준과 전력산업기술기준(KEPIC) 운영, 정책 연구, 전문인력 양성 등 산업의 기반 업무도 그대로 이어간다.

나아가 연합회는 기업, 발전사, 학계와 연구기관이 함께 미래를 논의하는 소통의 장이자, 정부와 산업 현장을 잇는 가교 역할을 더욱 강화해 나갈 것이다. 정책의 방향이 현장에 정확히 전달되고, 현장의 현실이 정책에 반영되는 선순환 구조. 이것이 우리 전기산업계가 만들어 나갈 그림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AI 패권을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이번 3대 메가프로젝트는 그 경쟁의 실질적인 토대가 결국 전기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전기를 적기에 공급하는 것이 국가 대도약의 선결 조건이라면, 전기산업계가 흔들림 없이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산업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이를 뒷받침하는 협력 체계와 정책 플랫폼의 무게도 함께 커질 수밖에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개별 기업과 업종의 경쟁력을 넘어, 전기산업 전체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다. 대한전기산업연합회는 산업계의 구심점이자 조율자로서 이 역사적 과제에 책임을 다해 나가겠다. 전기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히는 힘이 될 수 있도록, 현장과 국민 곁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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