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자의 아시아의 영성 (Spiritual Asia)㉖ |  자이나교 이야기] 불교와 함께 태어난 또 하나의 위대한 깨달음

인류 문명사에는 특별한 시대가 있다. 하나의 시대가 저물고 또 다른 시대가 열릴 때, 세상은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종교를 요구한다. 기원전 6세기 인도는 바로 그러한 전환기의 한복판에 있었다. 훗날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인류 정신사의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불렀다.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가 인간과 사회의 새로운 질서를 고민했고, 서아시아에서는 예언자들이 정의와 신앙을 외쳤으며, 그리스에서는 철학이 신화의 시대를 넘어 이성의 시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도에서는 두 명의 위대한 성인이 거의 같은 시대에 등장하였다. 한 사람은 불교를 연 석가모니였고, 다른 한 사람은 자이나교를 완성한 마하비라였다.

오늘날 세계인들은 불교에는 비교적 익숙하지만 자이나교에는 다소 낯설다. 그러나 인도 문명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자이나교는 결코 작은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인도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중요한 영성의 흐름이며, 비폭력과 생명존중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가장 철저하게 실천한 종교 가운데 하나이다.

자이나교의 역사는 마하비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자이나교는 스스로를 창시 종교라기보다 오래된 진리를 계승한 종교로 이해한다. 자이나교 전통에 따르면 인류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스물네 명의 '티르탕카라(Tirthankara)'가 있었으며, 마하비라는 그 마지막 스승이다. 티르탕카라란 문자 그대로 '강을 건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번뇌와 욕망이라는 강을 건너 해탈에 이르도록 다리를 놓아 주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마하비라 이전에도 수많은 수행자가 있었다. 특히 제23대 티르탕카라인 파르슈바는 역사적으로 실존 가능성이 높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마하비라는 그 전통을 계승하면서 더욱 엄격한 수행과 철저한 비폭력 사상을 확립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이나교의 창시자라기보다 완성자로 불린다.

기원전 6세기의 인도는 거대한 변화의 시기였다. 도시가 성장하고 상업이 발달했으며, 새로운 계층이 등장했다. 그러나 종교는 여전히 브라만 중심의 제사와 의례에 머물러 있었다. 인간의 영적 구원보다 형식과 신분이 앞서는 현실에 많은 사람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카스트 제도는 인간을 태어날 때부터 계층으로 구분했고, 종교적 의식은 일반 백성에게 너무 멀고 어려운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모순 속에서 자이나교와 불교가 거의 동시에 등장하였다. 두 종교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공통의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은 태어난 신분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수행과 도덕적 삶으로 완성되는 존재라는 믿음이었다.

마하비라는 왕족 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부족함 없는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서른 살 무렵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수행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오랜 세월 숲과 들을 떠돌며 극도의 절제와 명상을 이어 갔다. 굶주림과 더위, 추위와 조롱을 견디면서도 생명을 해치지 않는 삶을 실천하려 했다. 마침내 그는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고, 그 이후 수많은 제자를 길러 자이나교 공동체를 세웠다.

마하비라와 석가모니는 놀라울 만큼 닮았다. 두 사람 모두 왕족 또는 귀족 계층에서 태어났고, 부와 권력을 버렸으며,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는 길을 찾기 위해 수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석가모니는 극단적인 고행을 경험한 뒤 그것이 참된 깨달음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중도'를 제시했다. 지나친 쾌락도, 지나친 고행도 모두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마하비라는 인간의 욕망을 뿌리째 끊기 위해서는 훨씬 엄격한 절제와 수행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 삶을 가장 높은 가치로 삼았고, 자신을 철저히 절제하는 수행을 통해 영혼을 정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종교의 개성을 만들었다. 불교가 중용과 자비를 중심으로 널리 확산되었다면, 자이나교는 철저한 자기 절제와 비폭력을 중심으로 소수이지만 강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규모는 불교보다 작았지만, 윤리성과 실천성에서는 독보적인 전통을 이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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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챗GPT 생성


자이나교의 핵심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존귀하다는 믿음이 있다. 큰 동물은 물론 작은 벌레와 미생물까지도 생명을 가진 존재로 존중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사상은 훗날 '아힘사(Ahimsa)', 곧 비폭력의 철학으로 발전하였다. 자이나교 수도승들이 걸음을 옮길 때 작은 생명을 밟지 않기 위해 길을 살피고, 입을 가리는 천을 사용하는 전통도 이러한 생명존중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자이나교를 바라보며 종종 '너무 엄격한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그 엄격함 속에는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자연과 모든 생명을 함께 살리려는 깊은 성찰이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기후위기와 생태위기, 끝없는 소비와 경쟁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오늘날, 자이나교가 던지는 질문은 오히려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인간은 얼마나 더 가져야 하는가. 생명을 어디까지 이용할 수 있는가. 문명의 발전은 자연과 공존할 때만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자이나교는 이러한 질문을 2,500여 년 전에 이미 던졌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인간 문명이 스스로에게 던진 윤리적 물음이었다.

진정한 문명은 더 많이 소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더 많이 절제하는 지혜에서 시작된다. 자이나교는 우리에게 "강한 사람은 남을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이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기업은 이윤만이 아니라 생명과 환경을 함께 생각해야 하고, 정치는 권력보다 공공선을 앞세워야 하며, 언론은 자극보다 진실을 선택해야 한다. 개인 또한 끝없는 소비보다 절제와 배려를 실천할 때 삶은 더욱 깊어지고 사회는 더욱 건강해진다.

아힘사와 해탈, 생명을 위한 가장 엄격한 수행

자이나교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아힘사(Ahimsa)', 곧 비폭력이다. 그러나 자이나교가 말하는 비폭력은 단순히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저마다 존엄한 존재이며, 우주 안에서 각자의 역할과 가치를 지닌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인간만을 특별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작은 벌레 한 마리와 풀 한 포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생명까지도 모두 우주의 한 구성원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생명관은 당시 인도 사회에서는 매우 혁명적인 것이었다. 대부분의 종교가 인간과 신의 관계를 중심으로 설명할 때, 자이나교는 인간과 모든 생명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였다. 자연은 인간이 지배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이며, 생명을 함부로 해치는 행위는 결국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자이나교는 우주를 크게 두 가지 존재로 구분한다. 하나는 영혼을 뜻하는 '지바(Jīva)'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과 시간, 공간 등을 포함하는 '아지바(Ajīva)'이다. 인간은 육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그 영혼은 본래 무한한 지혜와 자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욕망과 집착, 분노와 탐욕으로 인해 업(業)이 영혼에 달라붙으면서 본래의 빛을 잃게 된다.

여기서 자이나교의 업 사상은 매우 독특하다. 불교가 업을 행위의 결과로 이해하는 데 비해, 자이나교는 업을 영혼에 실제로 달라붙는 미세한 물질과 같은 존재로 설명한다. 탐욕과 거짓, 폭력과 집착은 영혼을 무겁게 만들고, 그 결과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수행의 목적은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붙어 있는 업을 하나하나 씻어내는 데 있다.

이러한 수행의 최종 목적이 바로 해탈(Moksha)이다. 해탈은 죽음 이후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업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져 영혼 본래의 순수함을 회복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자이나교에서 해탈은 신이 내려주는 선물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노력과 수행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궁극의 경지이다.

그래서 자이나교는 철저한 자기 절제를 강조한다. 남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 더 어렵고 더 위대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은 마하비라의 삶 자체에 그대로 담겨 있다. 그는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자신을 바꾸려 했고, 인간을 구원하기 전에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려 했다.

자이나교 수행의 핵심은 다섯 가지 큰 계율에 있다. 첫째는 아힘사, 곧 비폭력이다. 둘째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셋째는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이다. 넷째는 욕망을 절제하는 청정한 삶이다. 다섯째는 무소유이다. 이 다섯 가지는 단순한 윤리 규범이 아니라 영혼을 자유롭게 만드는 수행의 길이다.

특히 무소유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현대인은 더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지만, 자이나교는 오히려 더 많이 소유할수록 더 많은 집착과 불안이 생긴다고 말한다. 물질이 많아질수록 인간의 자유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사슬이 더욱 굳어진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이나교 수도승들의 삶은 매우 엄격하다. 일부 수행자들은 최소한의 옷과 생활용품만을 지니며, 평생 걸어서 이동하고, 생명을 해치지 않기 위해 바닥을 살피며 걷는다. 어떤 수행자는 작은 생명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조심하기 위해 천으로 입을 가리기도 한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지나치게 엄격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심이 담겨 있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같은 시대에 태어났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불교는 중도와 자비를 통해 인간의 고통을 덜어 주려 했고, 자이나교는 철저한 절제와 비폭력을 통해 영혼을 정화하려 했다. 하나는 균형을 강조했고, 다른 하나는 철저한 수행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두 종교는 모두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적 책임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인류 문명사의 위대한 유산이다.

자이나교의 영향력은 인도 사회를 넘어 세계로 이어졌다. 특히 비폭력 사상은 후대에 큰 울림을 남겼다.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는 자이나교의 아힘사 정신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비폭력 저항을 자신의 정치철학으로 발전시켰다. 총과 칼보다 양심과 진실이 더 강하다는 그의 믿음은 자이나교 영성의 현대적 실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인류는 새로운 문명의 갈림길에 서 있다. 기후위기와 생태계 파괴, 무한경쟁과 소비주의,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은 인간에게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기술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인간은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더 많은 성장만이 진정한 발전인가.

이러한 시대일수록 자이나교의 목소리는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생명을 존중하고, 욕망을 절제하며, 자연과 공존하는 삶은 더 이상 종교적 이상만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 전략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ESG 경영과 지속가능한 발전, 동물복지와 환경보호, 윤리적 소비와 인공지능 윤리 역시 그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는 하나의 가치로 연결된다.

자이나교는 우리에게 거창한 기적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늘 하루 불필요한 욕심 하나를 내려놓고, 작은 생명 하나를 아끼며, 말 한마디를 더 따뜻하게 하고, 자연을 조금 더 존중하는 것에서 영성은 시작된다고 가르친다.

오늘날 국가도 기업도 같은 교훈을 새겨야 한다. 기업은 이익만이 아니라 사람과 환경을 함께 생각해야 하고, 정치는 대립보다 공존을 선택해야 하며, 언론은 갈등을 키우기보다 진실을 밝히는 길을 걸어야 한다. 개인 역시 끝없는 소유보다 절제와 배려를 실천할 때 삶의 품격은 더욱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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