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
최근 메모리 반도체 중심의 한국증시가 급락했다. 경기하강에 대한 우려와 레버리지 투자에 대한 경계, 그리고 차익실현이 겹친 결과다. 수급에 의한 급락은 수급 조정으로 반등하지만, 근본적으로는 4년 주기의 반도체 사이클 산업이라는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답이다. 반도체 초호황의 시대, 한국이 이 호황의 운을 실력으로 바꿔 길고 오래 가져가는 방법이 궁극의 해법이다.
반도체 호황, 운인가 실력인가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2026년 영업이익 합산이 600조 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국가 예산과 맞먹는 돈벼락이다. 그런데 어제의 급락은 이 잔치판이 얼마나 가벼운 다리 위에 서 있었는지를 보여줬다. 신용거래융자 잔액이 사상 최대치를 찍은 상태에서 차익실현 매물이 나오자 지수는 순식간에 10% 가까이 무너졌다. 펀더멘털이 깨진 것은 아니라는 진단이 우세하지만,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 시장이라면 그 호황의 뿌리부터 다시 물어야 한다.
작년 8월 이후 한국 메모리 업체들은 가만히 앉아 있었더니 메모리 가격이 5배에서 10배로 폭등했다. 이것을 실력이라 부르면, 로또 1등 당첨자에게 재테크 강연을 맡기는 격이다.
원인은 따로 있다. 2022~2023년 빙하기에 업체들이 설비투자를 대폭 줄였고, 그 후과가 2년 반 뒤 공급 절벽으로 돌아온 것이 지금 호황의 진짜 이유다. AI 데이터센터 붐은 그 위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태풍이 불 때는 돼지도 하늘을 난다. 지금 한국 반도체가 그 돼지의 자리에 서 있다. 문제는 태풍 뒤에 반드시 고요가 온다는 사실이고, 어제의 급락은 그 고요가 그리 멀지 않다는 예고편이었다.
업계에는 묘한 논리가 돈다. "이번엔 다르다." AI 데이터센터 수요가 구조적이니 과거의 메모리 사이클은 유물이 됐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경제학의 기본으로 돌아가자. 수익이 나는 곳에 자본이 몰린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뿐 아니라 마이크론, 그리고 중국의 CXMT까지 전속력으로 생산 능력을 확대하고 있다. CXMT의 수율이 지금보다 두 배만 올라도, 살얼음 같은 지금의 균형은 봄날 얼음처럼 녹아 내린다.
마치 봄날의 나팔꽃이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듯, 운을 실력으로 착각한 자는 다음 겨울을 버티지 못한다. 그 말이 가장 비쌀 때 나오는 것이 바로 "이번엔 다르다"이다.
메모리 구독경제, 을(乙)의 반란
한국 반도체의 진짜 병(病)은 43년째 같은 모델이다. 메모리를 만들어 판다. 가격이 오르면 천당, 내리면 지옥, 이 단순한 구조가 주가를 천당과 지옥 사이의 롤러코스터로 만든다. 주가급락이 반복되는 이유도 결국 이 사이클의 굴레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이클주의 저주다. 지금 이 황금기에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다음 빙하기는 피할 수 없다.
해법은 구독경제다. 메모리를 파는 대신 빌려주고 월 단위로 현금흐름을 만드는 모델이다. 롤스로이스는 제트엔진을 팔지 않고 비행 시간당 요금으로 받는다. 그 한 가지 발상의 전환으로 엔진 제조사와 항공사의 힘의 균형이 뒤집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과 DDR5를 이런 방식으로 공급한다면, 빅테크의 초기 부담이 줄어드는 동시에 메모리 기업은 가격 변동과 무관한 안정적 수익을 쥐게 된다. 사이클이 완화되면 주가는 더 이상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놀이기구가 아니라 꾸준히 오르는 에스컬레이터가 된다.
선물시장 개설, 가격결정권 탈환
지금 메모리 가격은 누가 정하는가. 이론상으로는 수급이지만, 현실에서는 구매자인 빅테크의 협상력이 절대적이다. 경기 하강기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가격을 올리고 싶어도 구매자들 앞에서 머리를 숙여야 했다. 43년간 갑이 되어본 적 없는 영원한 을의 신세였다.
공격적인 해법은 메모리 상품선물시장 개설이다. 원유는 OPEC의 생산 조절과 뉴욕상품거래소 선물시장이 결합해 산유국이 가격 주도권을 쥔다. 철광석은 다롄상품거래소가, 구리는 런던금속거래소가 가격의 중심이다. 그런데 세계 최대 메모리 생산국인 한국에는 이런 거래소가 없다. 한국거래소든 별도의 메모리 거래소든, 반도체 상품거래시장을 만들면 가격 결정의 무게중심이 구매자의 협상 테이블에서 시장 메커니즘으로 옮겨간다. 최근의 반도체주가 같은 급락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면, 결국 가격을 누가 쥐고 있느냐의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표준화, 빅테크의 거부감, 공정거래법상 담합 우려라는 세 가지 장벽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JEDEC 표준이 이미 HBM3E와 DDR5 규격을 상당 부분 정리해놨고, 선물시장은 빅테크에게도 가격 헤징이라는 선물을 준다. 시장 메커니즘으로 설계하면 담합이 아니라 합법적 가격 발견이 된다. 원유를 파는 나라가 OPEC을 만들었다. 메모리를 파는 나라가 선물시장을 못 만들 이유는 없어 보인다.
지금의 선택이 2028년을 결정한다
한국 반도체 43년 역사에 처음 온 돈벼락이다. 최근 주가 급락이 알려준 것은 단 하나다. 운으로 쌓은 호황은 운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번 것을 갈라먹는 데만 집중하면, 다음 사이클에 더 큰 것을 놓친다. 성과급을 얼마나 더 받느냐보다, 이 황금기를 어떻게 구조적으로 연장하고 제도화하느냐가 진짜 숙제다.
구독경제와 선물시장, 이 두 가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공동 태스크포스를 꾸리고, 정부가 한국거래소와 함께 메모리 선물시장의 타당성 검토에 착수한다면, 2~3년 안에 파일럿 단계까지 진입할 수 있는 현실적인 로드맵이다.
반도체특별법 개정과 국가전략산업 지정 같은 제도적 뒷받침이 따라준다면 속도는 더 빨라진다. 문제는 의지이지 기술이나 법리가 아니다. 호황의 한가운데서 위기를 대비하는 나라와, 위기가 닥쳐야 비로소 대책을 세우는 나라의 운명은 전혀 다르게 갈린다.
2022~2023년의 빙하기가 오늘의 황금기를 만들었듯, 지금의 선택이 2028년을 결정한다. 반도체주가 급등락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이 호황을 발판으로 사이클의 굴레 자체를 끊어낼 구조를 설계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운은 어쩌다 한 번 오고, 실력은 반복된다. 한국이 반도체에서 운을 실력으로 바꾸는 나라가 된다면, 다음 호황기에는 600조 원이 아니라 6,000조 원을 버는 구조가 가능해진다. 그렇게 되면 무역적자도, 세수 부족도, 국민연금 고갈 우려도 상당 부분 해소된다. 반도체 하나가 나라를 먹여 살리는 진짜 조건은, 호황이 아니라 호황을 다루는 방식에서 만들어진다.
전병서 필자 주요 이력
▷칭화대 석사·푸단대 박사 ▷대우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반도체IT 애널리스트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겸임교수 ▷중국경제금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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