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영의 우.다.세] 타인보다 힘든 가족이라는 족쇄 -영화 '케빈에 대하여'

  • '괴물'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 ‘다양성 영화’는 단순히 장르를 뜻하기보다 상업 중심의 주류 영화와는 다른 시선·형식·주제를 가진 영화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양한 국적, 장르, 소수성 등을 포함하는 범주를 갖고 있다. 누군가는 불편하다며 외면했던 이야기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마주하는 역할을 기대해본다. '우'리들의 '다'양한 '세'상을 위해.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사진=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틸컷]
[사진=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틸컷]

영화 속 케빈(에즈라 밀러)은 활과 화살로 친구들과 교사들을 차례로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세상은 그를 ‘괴물’이라 부른다. 하지만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학살을 저지른 케빈보다 그 뒤에 남겨진 엄마 에바(틸다 스윈튼)를 조명한다. 거리에서 욕설을 듣고, 뺨을 맞고 집이 빨간 페인트로 뒤덮이면서도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에바의 모습을 비춘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사건이 벌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데, 이는 한 엄마와 한 아들이 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과정을 거꾸로 되짚는 심리극에 가깝다. 
 
가족이라는 굴레

에바는 흔히 떠올리는 ‘엄마’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여행 작가로 세상을 누비며 자유롭게 살던 그에게 갑자기 찾아온 아이는 선물보다 더욱 무거운 것이었다.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안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에바의 얼굴에는 기쁨보다 당혹감이 먼저 보인다. 차라리 공사장의 소음이 낫다고 생각해서일까, 아이가 탄 유모차를 끌고 밖으로 나간 에바는 공사장의 소음으로 아이의 울음을 지우려 하지만 그건 잠깐이다. 육아는 그에게 행복한 일상이라기보다 자신의 일상에 찾아온 불청객에 가까워 보인다.

아이를 낳는 순간 사랑도 함께 태어날 것이라는 모성에 대한 의미는 사실 신화에 가깝다. 모든 엄마가 모성을 본능적으로 느끼진 않으며 어떤 사람에게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지는 관계일 수 있다. 에바는 엄마가 될 준비를 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자유보다 아이를 우선시해야 하는 삶이 그녀에겐 낯선 대륙으로 건너가는 일보다 어려운 일인 것이다. 모성의 부재와 의무적 양육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아이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음을 느낀다. 
 
[사진=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틸컷]
[사진=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틸컷]
 
갓난아기였던 케빈은 엄마 품에서는 유난히 많이 울고, 엄마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좀처럼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성장한 뒤에도 그는 아버지 앞에서는 다른 얼굴을 하고선 엄마 앞에선 일부러 상처를 주거나 불안하게 만든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잖아”라며 끊임없이 이를 확인하려는 듯 행동한다.

엄마의 시선 속에서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임을 일찍부터 체득해서일까, 케빈의 애정을 갈구하는 방식은 점차 관계를 비틀고 파괴하는 방식으로 뒤틀린다.

에바의 남편 프랭클린은 에바가 케빈에게 느끼는 불안을 예민한 반응 정도로 치부하며 문제를 회피하다 아들의 손에 의해 죽임 당한다. 만약 프랭클린이 에바의 불안을 들여다보고 케빈의 뒤틀린 마음을 돌아봤다면 과연 이 이야기의 끝은 달랐을까.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관계는 한쪽의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증, 어쩌면 지독한 집착

케빈은 말한다. “사랑하는 것과 익숙해지는 것은 달라요. 엄마도 나를 익숙하게 여기기는 하잖아요.”

어쩌면 케빈은 16년 동안 진심으로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도 사랑받기를 간절히 원했을지 모른다. 케빈은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받을 수 없다면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어그러진 사랑의 마침표를 찍었다. 

에바 역시 끝내 이상적인 엄마가 되지 못했고, 케빈 역시 부모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 사람은 덜 사랑했고, 한 사람은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간극은 서로를 괴물로 만드는 파국을 나았다. 

두 사람은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 묶였으나 어쩌면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이었다. 케빈은 에바를 원했고, 에바는 케빈을 사랑하려 애썼지만 그 사이에는 끝내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 존재던 것이다.

에바를 무책임한 나쁜 엄마로, 케빈을 소시오패스 살인마라고 단정할 수 없다. 영화 속에서도 끝내 케빈이 갖고 있는 ‘악(惡)’을 어느 하나의 원인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케빈의 타고난 기질, 부모와의 온전하지 못한 애착 관계 혹은 영화에 다 담기지 못한 케빈의 사회적 맥락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서로를 괴물로 만든 모자(母子)의 이야기가 아닐까. 정상적으로 사랑을 주는 방식을 알지 못한 엄마와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해 미쳐버린 아들의 말로는 끔찍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그럼에도 영화 속 에바는 교도소에 있는 케빈을 주기적으로 찾아가 그의 상태를 살핀다. 그 순간 영화는 선악의 이야기는 멈춘 채 다시 관계의 시점으로 돌아온다. 상처받았지만 끝내 외면할 수 없는 사이, 부모와 자식이라는 복잡한 운명으로 얽힌 이들의 무한한 굴레. 피로 얼룩진 케빈의 시간은 어쩌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간 비극의 기록일지 모른다.
 
사진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틸컷
[사진=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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