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설 | 기본·원칙·상식] 9·19 복원론 멈춘 이유…안보는 희망 아닌 현실이다

남북 관계는 늘 두 개의 감정 사이를 오간다. 하나는 전쟁의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에 대한 기대다. 문제는 기대가 현실을 압도할 때다. 국가는 희망으로 미래를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안보만큼은 냉정한 현실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최근 정부가 추진해온 9·19 남북 군사합의 일부 복원 검토를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SBS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초까지 비행금지구역 복원을 포함한 9·19 군사합의 일부 복원을 검토했고, 관계 부처 협의는 물론 유엔사와의 논의까지 진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이 지난 2월 노동당 회의에서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실체”라고 규정하고 “동족의 범주에서 영원히 배제하겠다”고 선언한 뒤 관련 검토와 협의가 중단됐다는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7일 전군의 사ㆍ여단 지휘관들의 회합을 소집하고 남부국경을 지키는 제1선부대를 강화해 국경선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기 위한 군사조직구조 개편 구상을 밝혔다고 조선중앙TV가 18일 보도했다 사진조선중앙TV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7일 전군의 사ㆍ여단 지휘관들의 회합을 소집하고 남부국경을 지키는 제1선부대를 강화해 국경선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기 위한 군사조직구조 개편 구상을 밝혔다고 조선중앙TV가 18일 보도했다. [사진=조선중앙TV 연합뉴스]



결국 냉혹한 현실이 기대보다 앞선 셈이다.


9·19 군사합의는 2018년 평양 남북정상회담의 후속 조치로 체결됐다. 군사분계선 일대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우발적 충돌 가능성을 줄이자는 취지였다. 육상·해상·공중에서 군사훈련을 제한하고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해 긴장을 완화하자는 내용도 담겼다. 전쟁 위험을 낮추고 평화를 관리하자는 시도 자체는 평가받을 만했다.


문제는 군사합의가 일방의 선의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군사적 신뢰는 상호주의를 전제로 한다. 한쪽만 지키고 다른 한쪽이 이를 무시한다면 평화는 유지되지 않는다. 실제로 북한은 포 사격과 군사정찰 활동, 무인기 침투, 미사일 발사 등을 이어가며 9·19 합의 정신을 훼손해 왔다. 한국 정부 역시 지난해 일부 효력 정지 조치를 취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비행금지구역 복원을 선제적으로 검토했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논란을 부를 수 있다. 평화를 위한 의지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안보 정책은 상대의 의도를 희망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 특히 북한처럼 체제 자체가 군사적 긴장과 대남 적대 전략 위에 서 있는 상대일수록 더욱 그렇다.


북한은 지난해 말 노동당 전원회의 이후 남북 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해 왔다. 이번 당 회의에서는 표현 수위가 한층 더 강해졌다. 한국을 화해와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사실상의 적대 국가로 선언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호응 가능성이 불투명한데도 군사적 제한 조치를 먼저 복원하려 했다는 점은 국민에게 불안감을 줄 수밖에 없다.


안보는 선의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상대의 의도보다 능력을 먼저 봐야 하는 것이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다.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유지하면서도 외교를 병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냉전 시기 유럽의 평화 역시 이상주의만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었다. 강력한 억지력과 힘의 균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북한 문제는 늘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컸다. 대화 국면이 열릴 때마다 평화 기대는 커졌지만, 그 사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은 더욱 고도화됐다. 북한은 경제난 속에서도 핵무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최근에는 러시아와의 군사 협력까지 확대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평화 의지만으로 접근한다면 오히려 안보 불안을 키울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대화를 포기하자는 뜻은 아니다.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충돌 위험을 줄이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냉정한 현실 인식이어야 한다. 상대가 어떤 전략을 갖고 움직이는지, 실제 행동은 무엇인지를 면밀히 따져야 한다. 평화를 원할수록 더 냉정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안보 정책은 감정이나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국가 생존의 문제다. 군은 상대의 선의를 믿는 조직이 아니라 최악의 가능성까지 대비하는 조직이어야 한다. 그래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 국가안보는 낙관론이 아니라 대비와 억지 위에서 유지된다.


이번 사안에서 정부가 북한의 대남 적대 노선이 분명해진 이후 9·19 복원 검토를 멈춘 것은 현실적 판단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다. 정부는 평화를 말하더라도 국민에게 현실을 숨겨서는 안 된다. 안보 상황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왜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그래야 정책의 신뢰도 생긴다.


한반도 평화는 중요하다. 그러나 평화는 구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힘과 신뢰, 그리고 냉정한 현실 인식이 함께할 때 비로소 지속될 수 있다. 국민은 평화를 원한다. 동시에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길 바란다. 안보는 희망사항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하는 국가의 책무다. 그래서 안보는 언제나 현실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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