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정세 악화로 촉발된 나프타 조달 불안이 일본 산업 현장을 넘어 정치권으로 확산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전체 물량은 충분하다"며 불안 차단에 나서고 있지만, 포장재와 인쇄잉크, 도료, 주택설비 등 현장에서는 조달 차질과 가격 상승에 대비하는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일본에서는 20일 국회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와 야당 대표들이 맞붙는 당수토론이 열렸다. 중동 정세 악화에 따른 추가경정예산 편성 문제와 나프타 공급 불안이 주요 의제로 오르면서, 원자재 수급 문제가 산업 이슈를 넘어 정치 쟁점으로 부상했다.
아사히신문은 21일 다카이치 총리가 전날 열린 당수토론에서 나프타 공급 불안과 관련해 "여러 현장에서 병목이 생기고 있다"며 "충분해야 할 나프타가 현장에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나프타 총량 자체가 부족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유통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이날 토론에서 야당 측은 자재 조달난과 가격 급등을 들어 공급 측 기업에 대한 지원을 요구했고, 다카이치 총리는 해소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부와 현장의 인식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식품 대기업 가루비(Calbee)의 포장 교체다. 가루비는 지난 12일 나프타를 원료로 하는 인쇄잉크 조달이 불안정해졌다며 포테이토칩 등 주력 14개 상품을 흑백 포장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사히에 따르면 이 소식을 접한 일본 총리관저 간부는 가루비의 대응에 대해 공급 불안을 과도하게 부각해 언론 노출을 노린 것 아니냐는 취지로 강한 불쾌감을 보이며, 인쇄 잉크 부족 가능성을 일축했다.
일본 정부는 가루비의 발표 직후 곧바로 회사 측과 접촉해, 나프타 전체 수급 기준으로는 필요한 양이 확보돼 있다는 점을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총리 주변에서는 가루비의 대응이 과잉 반응으로 비치고, 이런 움직임이 보도되면 다른 기업들로도 불안이 번질 수 있다며 파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가루비는 "상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대응"이라며 흑백 포장 전환 방침을 바꾸지 않고 있다.
정부가 이처럼 예민하게 반응하는 배경에는 원자재 부족 불안이 소비와 기업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높은 지지율을 국정 운영의 동력으로 삼고 있는 다카이치 정권으로서는 공급 불안이 물가 불안과 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번지는 상황을 경계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일본 주택 설비 대기업 TOTO가 나프타 유래 용제 조달 불안을 이유로 유닛 배스 신규 수주를 일시 중단하자, 경제산업성이 곧바로 수급 상황 파악과 공급망 조정에 나섰다. 이후 TOTO는 단계적으로 신규 수주를 재개했다. 그러나 비슷한 조달 불안 사례가 잇따르면서, 정부 내부에서는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개별 사안을 뒤쫓아 수습하는 식의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말도 나온다고 아사히는 전했다.
정부가 "나프타는 충분하다"고 설명하는 근거는 총량 계산에 있다. 아사히에 따르면 일본의 평상시 나프타 공급량은 월 약 280만 ㎘(킬로리터)로, 중동산 수입 약 120만 ㎘, 국내 정제 약 110만 ㎘, 중동 이외 지역 수입 약 45만 ㎘로 구성돼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중동산 수입이 급감하자, 일본 정부는 석유비축분을 활용해 국내 생산을 유지하고, 미국·페루 등 중동 외 지역 조달을 늘려 부족분을 메우겠다는 계산이다. 여기에 민간이 보유한 나프타 유래 중간제품 재고까지 나프타로 환산해, 월간 사용량 기준 1.8개월분을 확보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말하는 '총량'과 기업 현장에서 필요한 '품목별 물량'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중간제품은 특정 용도에 맞춰 만들어져 서로 대체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체 물량이 충분해도 특정 제품에서는 부족이 발생할 수 있다. 에너지경제사회연구소의 마쓰오 고 대표는 아사히에 "일부 제품이 부족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나프타로 환산한 재고량과 실제 현장에서 쓸 수 있는 재고 사이의 차이가 혼란을 키우고 있다는 취지다.
물량뿐 아니라 가격도 문제다. 정부는 전체 공급량을 기준으로 "충분하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중동 외 지역에서 대체 조달하는 과정에서 원료 가격과 운송비가 오르면 기업의 실제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인쇄잉크업계에서는 이미 30% 이상 가격을 올린 기업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종이기저귀와 낫토 등 포장재에 나프타 유래 원료를 쓰는 소비재에서도 가격 인상이 이어지고 있다.
아사히는 일본 정부가 사회 불안을 막기 위해 "전체적으로는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반복하고 있지만, 기업들은 조달 차질과 가격 상승에 대비해 선제 대응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중동발 공급망 불안이 에너지 가격을 넘어 생활용품과 주택설비 등 실물경제 전반으로 확산하면서 다카이치 정권의 위기관리 능력도 시험대에 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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