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우의 공정경제] 연금이 돌봄을 짓고 AI가 공장을 살린다

  • 국민연금의 공익적 사회투자 활성화가 열 새로운 미래는?

이용우 전 국회의원
[이용우 전 국회의원]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의 거센 파고 속에서, 대한민국 제조업 특유의 신속하고 안정적인 다품종 대량생산 역량이 다시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 혁명의 도래와 맞물려 연산 인프라를 좌우하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반도체와 초고압 송전망 설비 등 물리적 하드웨어 생산 기반이 글로벌 패권 경쟁의 요체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화려한 이면에는 심각한 자산 및 소득의 양극화라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글로벌 가치사슬(GVC) 최상단에 안착한 극소수의 대형 수출 대기업들은 사상 유례없는 호황 속에서 주가 상승 등 자산 효과의 혜택을 전폭적으로 누리는 반면, 영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은 철저히 소외되어 내수 붕괴의 충격을 온몸으로 감내하는 처지다. 가계의 실질 가처분소득 감소는 골목상권의 정체를 유발했고, 이는 자영업 생태계의 대량 폐업이라는 생존형 도미노 위기로 번졌다. 대기업 성장의 낙수효과가 수명을 다한 지금, 우리 경제정책이 마주한 구조적 과제는 자명하다. 성장 온기가 중소기업과 자영업으로 흐르는 순환 구조를 안착시키고, 초저출생과 생산연령인구 감소에 따른 보육·부양 부담의 인구학적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구조적 병목은 기존의 관점을 과감히 바꿀 때 비로소 질적 재도약의 새로운 기회로 전환된다.

관점의 전환 1: 국민연금의 공익적 사회적 투자 활성화와 복지 인프라 자산화

첫 번째 관점의 전환은 인구 구조 위기를 다루는 태도, 즉 국민연금의 공익적 '사회적 투자' 활성화와 복지 인프라 자산화에서 출발한다. 청년 세대가 자녀 출산을 기피하는 근본적인 배경은 주거비와 사교육비를 포함한 가구당 양육 비용이 실질 가처분소득을 압박해 공동체적 생존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1인당 GDP 대비 약 8배에 달하는 가구당 양육 비용은 이미 개별 가계가 사적으로 감내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섰음을 증명한다. "아이 한 명을 제대로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인류학적 통찰은 이제 국가가 양육 부담을 공동 분담하는 실질적인 '복지 분산 구조'의 구축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여기에 65세 이상 고령자 비중이 전체 인구의 20%를 초과하는 초고령 사회의 도래는 사회 전체의 잠재적 위험 요인을 배가하고 있다. 오는 2052년 무렵 고령자 인구 비율이 40% 선을 상회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 속에서 고령 빈곤은 그 자체로 거대한 사회적 재앙이다. 기대수명은 눈부시게 늘어났으나, 이를 지탱해 줄 재정적 보호막은 턱없이 얇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돌봄과 보육, 고령층 부양을 단순한 소모성 재정 비용이나 국가 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장애물로 취급하는 소극적·방어적 관념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증유의 복합 돌봄 수요는 역설적으로 거대한 신시장과 차세대 산업 생태계를 견인할 실물 유효수요의 보고이자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의 원천이다. 거시 경제적 성장의 기회는 사회적으로 가장 결핍된 지점에 대규모의 체계적 공급 시스템을 구축할 때 출현하는 법이다.

따라서 노후 소득 보전과 사회적 위험 분산의 핵심 축인 국민연금의 기금 운용 방식을 실물 복지 인프라 구축이라는 '사회적 투자'의 관점으로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국민연금법 제1조는 '국민의 생활 안정과 복지 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을 제도의 목적으로 명시하고 있으며, 제102조 제2항에는 공공투자, 복지투자를 비롯해 환경(E)·사회(S)·지배구조(G) 요소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기금을 운용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현재 국민연금의 공익적 사회투자는 전무한 상태다.

국민연금 도입 초기, 기금은 여유자금을 정부에 의무 예탁하여 사회간접자본(SOC) 확충과 공공 투자 재원으로 활발히 활용되었으나, 기금 운용의 독립성과 수익성을 저해한다는 비판에 직면한 바 있다. 국회의 예산 심의를 거치지 않고 행정부가 국민의 노후 자금을 임의로 꺼내 쓰는 '정부의 쌈짓돈'으로 전락해 제도 자체의 신뢰를 흔들었다는 지적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기금 여유자금 예약 및 사용 한도를 1999년 65%로 제한하기 시작하여 2000년 40%로 축소했고, 2001년에는 정부 예탁 차입 의무 한도를 전면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점을 계기를 기금 운용의 무게 중심은 철저하게 자본시장 중심의 주식, 채권 등 금융 투자 위주로 완전히 이동하였다.

금융 자산의 단기 수익률 극대화에만 치중하는 현재의 기금 운용 체제는 저출생 및 인구 수축으로 기금에 진입할 생산연령인구가 마르는 상황에서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국민연금의 사회투자를 국가 돌봄망 구축 및 재생산 환경 조성이라는 거시적 시각에서 재평가한다면 전혀 다른 미래가 열릴 수 있다. 그 이론적 근거는 기존 연금고갈 계산 공식에서 철저히 외면해 온 '긍정적 외부성(Positive Externality)' 효과에 기인한다. 보험의 원리를 생각해 보라. 개별 사고만 놓고 보면 보험 재정은 항상 적자다. 그러나 사회 전체적으로는 위험을 효과적으로 분산하여 경제 공동체의 안정성을 보장한다.

만약 국민연금 기금의 일부(예: 0.5%에서 1.0% 수준)를 국공립 보육 시설이나 공공 노인 돌봄 서비스, 혹은 청년 및 신혼부부를 위한 맞춤형 주거 자산화에 투자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가계의 사적 돌봄 비용과 주거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춰주는 실질적인 소득 증대 효과를 수반한다. 가계의 경제적 부담이 경감되면 혼인율과 출산율이 자연스럽게 반등할 것이고, 이는 중장기적으로 연금 가입자 수와 기여금 수납 총량을 늘려 기금의 조기 고갈을 지연시키는 선순환 고리를 완성한다. 단기 금융 지표에만 일희일비하는 협소한 시야에서 벗어나, 사회적 파급 효과와 연금 제도 자체의 장기 지속 가능성으로 시각을 전폭적으로 넓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이 대안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아직 부족하고 정량적 효과에 대한 실증 연구가 미진하다는 한계는 있다. 그렇기에 기금의 최소 0.5% 내외의 소규모 재원을 정교하게 배정하여 선도적인 시범 테스트(Pilot Test)를 가동하고, 정밀 데이터를 바탕으로 효과를 검증하면서 적정 사회투자 모델과 자산 규모를 찾아나가는 전략이 실행되어야 한다.

돌봄에 대한 사회적 수요의 급증은 이에 대응하는 새로운 서비스 산업과 내수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회가 된다. 돌봄은 여성의 경력단절을 예방하여 노동 공급을 유지하는 강력한 생산 활동이며, 고령 빈곤을 방어하고 품위 있는 노후 소득 보장을 지원하는 직접적인 복지 장치다. 또한 자녀를 낳고 기를 때 소요되는 사적 비용을 사회 공동체가 현명하게 나누어 갖는 가장 평등한 방식이기도 하다. 국가 성장의 궁극적인 목표가 개별 성원의 노후 불안을 경감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다면, 돌봄 인프라 확충은 소모성 지출이 아니라 국가 성장 전략의 핵심 거점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처럼 사회적 투자가 유도하는 외부경제적 편익과 연금 재정의 안정화 메커니즘은 매우 유기적인 인과관계를 형성한다. 보육 및 공공 의료 등 필수 돌봄 인프라에 선제적으로 투자함으로써 여성의 노동시장 복귀를 촉진하고, 이를 통해 연금 가입 기간 연장과 기여금 수입 확대를 직접 도출할 수 있다. 아울러 맞춤형 공공 주택 구축과 연계하여 실물 복지 자산화 수준을 증대한다면 청년 세대의 결혼 및 양육 진입 장벽을 근본적으로 낮추는 실효적 정책으로 귀결될 것이다.

관점의 전환 2: 중소 제조업의 피지컬 AI 도입을 통한 기술·공정 혁신과 신산업 전환

두 번째 관점의 전환은 수출 시장 소외와 생산성 정체, 그리고 숙련 노동 고령화로 인해 쇠락해 가는 중소형 하청 제조업을 사양 산업이 아닌 한국 가치사슬망의 독보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핵심 자산으로 재정의하는 것이다. 미·중 안보 갈등과 서방 주도의 경제 디커플링, 탈세계화는 산업 안보 역량과 정밀 엔지니어링 역량을 겸비한 제조업을 보유한 국가들만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동맹 파트너로 선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고성능 반도체, 미래 모빌리티, 청정에너지 등 군사와 민간 양 분야를 지배하는 이중용도 기술(Dual-use Tech) 가치사슬의 진입 자격은 해당 국가가 하위 기저 기술을 지탱할 정밀 부품 및 금형 가공 인프라를 독자적으로 수호하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AI 시대의 흐름에서 소버린 AI(Sovereign AI)와 함께 '피지컬 AI(Physical AI)'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현재 가치사슬 하단에 처한 뿌리 중소기업들의 생산 현장은 벼랑 끝에 서 있다. 이들 기업의 미시 공정 노하우는 대개 고령의 마스터 숙련공 개개인의 머릿속과 손끝에 화석화된 채 구전되는 '암묵지(Tacit Knowledge)' 자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암묵지는 정형화된 데이터의 부재로 인해 디지털 인공지능의 학습 데이터로 변환되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며, 청년층의 제조업 기기 기피 현상과 맞물려 기술을 전수받을 후계자마저 은퇴를 앞둬 원천 기술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아울러 피지컬 AI 시대를 관통하여 지능화 설비 전환에 투자하려는 혁신적 의지가 존재하더라도, 실물 산업에 배분되는 금융 유동성 저하로 인해 기초 설비 혁신 재원을 조달할 길이 막혀 고사의 위험을 앞두고 있다. 소제조업의 무형의 공정 기술력을 디지털 정밀 데이터로 신속히 전환하여 첨단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업종 다변화를 달성하도록 이끄는 전방위적 산업 재조정 정책이 필요하다.

이 위기 속에서 원천 제조 노하우를 버리지 않고 창조적으로 고도화하여 첨단 부품·소재 영역으로 업종 다변화를 달성한 강소기업들의 전환 성공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표적으로 고정밀 가공 및 금형 솔루션 기술을 바탕으로 반도체 패키징 분야 글로벌 HBM 핵심 장비인 TC 본더 시장을 장악한 '한미반도체'의 사례가 있다. 또한 발포제 기반의 전통 기초 정밀화학 기술을 활용해 극미세 반도체 노광 공정의 필수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 국산화에 성공한 '동진세미켐', 대기오염 방지 등 기초 환경 엔지니어링 역량을 바탕으로 친환경 배터리 핵심 양극재 가공 및 리사이클 공정 기술로 극적인 전환을 이룬 '에코프로', 그리고 전통 목재 가공에 따른 화학 합성 및 바인더 노하우를 고부가가치 전기차 배터리 핵심 전해액 소재 산업 제조 기술로 치환해 낸 '동화기업' 사례 등은 전통 기초 원천 기술이 지니는 강력한 신산업 변용 가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기업명 원천 기초 기술 기반 기술 전환 전통기술의 활용 전환
한미반도체 고정밀 가공 및 금형 솔루션 기술 반도체 패키징 분야 글로벌 HBM 핵심 장비(TC 본더) 시장 장악 기존의 정밀 금형 기술 가치를 폐기하지 않고 첨단 반도체 지능형 가동 메커니즘으로 승화함
동진세미켐 발포제 기반의 전통 기초 정밀화학 기술 극미세 반도체 노광 공정의 필수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 국산화 화학 반응 제어 노하우를 첨단 IT 나노 소재 엔지니어링 영역으로 고도화하여 가치 창출에 성공함
에코프로 대기오염 방지 등 기초 환경 엔지니어링 역량 친환경 배터리 핵심 양극재 가공 및 리사이클 공정 기술로 전환 전통 환경 정화 제어 기술을 이차전지 양극재 합성 공정 생산성 제고에 완벽히 응용함
동화기업 목재 가공에 따른 전통 화학 합성 및 바인더 노하우 고부가가치 전기차 배터리 핵심 전해액 소재 산업 제조 기술 치환 전통 화학 가공 노하우를 이차전지 고성능 화학 유체 제어 엔지니어링 기술로 창조적으로 변용함

결론: 인구와 산업의 유기적 상생을 이끄는 실물 공조 모델의 실현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복지와 제조업을 상호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창조적 정책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한다면, 이 전대미문의 복합 위기는 새로운 경제 도약의 발판으로 승화될 수 있다고 본다. 글로벌 경기 둔화와 보호무역주의 장벽이 거세지는 격변의 시기 속에서, 인구 소멸이라는 체제 위기와 산업 공급망의 중추인 전통 하청 제조업의 붕괴를 한꺼번에 맞닥뜨린 대한민국은 골든타임의 마지막 순간에 서 있다.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복지와 제조업을 상호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창조적 정책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해야만 한다. 국민연금의 전향적 사회투자와 전통 제조업의 피지컬 AI 도입은 우리 사회 공동체의 존속과 성원의 존엄을 지켜내기 위한 가장 정교하고 실천적인 해법이 될 것이다.  

공적 연기금이 구축하는 거대한 복지 공공 자산과 지능형 뿌리 제조업체들이 생산하는 물리 지능 로봇 기기들의 연계를 유도함으로써, 복지 서비스 단가 혁신과 기술 기반 수출 제조업의 도약이라는 인구·산업 동시 수호의 길을 전격적으로 실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서울대 경제학 박사 ▷제21대 국회의원 ▷카카오뱅크 공동대표 ▷한국투자신탁운용 총괄 최고투자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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