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8일 오후 3시,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는 한 언론인의 이름 앞에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이 모였다. 고하(古下) 송진우 선생 탄신 136주년이자 서거 81주기를 기리는 추모식이었다.
재단법인 고하송진우선생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국가보훈부와 동아일보가 후원한 이날 행사는 단순한 기념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언론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다시 묻는 자리였다.
현충관의 공기는 엄숙했다. 국민의례로 시작된 추모식은 약전 봉독, 추모식사, 추모사, 기념강연, 추모공연, 헌화와 분향, 묵념으로 이어졌다. 독립운동가 후손과 보훈 관계자, 학계와 언론계 인사, 시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해 고하의 삶을 되새겼다.
이날 현병철 고하자유민주연구원장은 “고하 선생이 남긴 자유와 책임, 평화와 공존, 통합과 민주주의 정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단순한 추모사의 문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의 한국 사회를 향한 준엄한 경고이자, 갈라진 시대를 향한 묵직한 성찰이었다.
유홍림 서울대학교 총장도 고하의 삶을 깊이 기렸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선생은 개인의 안위 대신 민족의 자유와 존엄이라는 목표에 자신을 결부시켰다”고 말했다. 이 한 문장 속에 고하의 생애가 압축돼 있다.
고하는 언론인이었으나 단지 신문만 만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교육자였고 독립운동가였으며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이름 위에 놓인 가장 큰 이름은 ‘공인(公人)’이었다.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책임 앞에서 자신의 안위를 뒤로 미뤘고, 민족과 공동체의 운명을 먼저 생각했다.
고하 송진우 선생의 호 ‘고하(古下)’는 ‘옛것의 아래에 선다’는 뜻을 품고 있다. 스스로를 앞세우지 않고 역사와 전통 앞에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다. 이것은 단순한 겸양의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태도이며, 전통과 근대, 민족과 세계, 자유와 책임을 함께 보려 했던 근대 지식인의 정신이었다.
이날 추모식의 마지막 울림은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이자 고하 선생의 장손인 송상현 교수의 추도 메시지에서 더욱 깊어졌다. 송 교수는 고하의 삶을 단순한 가족사의 기억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독립을 위해, 광복 후에는 자유민주주의 건국을 위해 평생을 바친 분”이라고 회고하며, 선생이 지키고자 했던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적 자존의 가치를 다음 세대에도 온전히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립과 건국의 정신, 그리고 언론의 본령을 다시 새기는 시간이었다.
현충관을 나서는 참석자들의 발걸음이 무거웠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날 우리는 단지 한 사람의 언론인을 추모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언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있었던 것이다.
고하 송진우는 누구인가. 고하는 1890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신평이며, 호는 고하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고, 의병장 기삼연에게서 수학하며 나라 잃은 시대의 비애를 일찍 배웠다. 이후 신학문을 접한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올라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유학 시절 그는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동문수학의 차원을 넘어섰다. 그것은 시대를 함께 건너간 관포지교(管鮑之交)였다. 중국 춘추시대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처럼, 고하와 인촌은 서로의 뜻을 알고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며 민족교육과 민족언론의 길을 함께 걸었다.
인촌이 자본과 조직으로 민족교육과 언론의 기반을 세웠다면, 고하는 정신과 논리, 필봉으로 그 길을 지탱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역할을 맡았으나 목표는 하나였다. 식민지 조선의 민족정신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귀국 후 고하는 중앙학교 교감이 되었고, 이어 교장에 올랐다. 당시 중앙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었다. 그곳은 민족의식의 산실이었고, 3·1운동의 기운이 자라난 공간이었다.
고하는 김성수, 현상윤, 최린, 최남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그는 구속돼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법정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사실상 1년 반 가까운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감옥은 그의 신념을 꺾지 못했다. 1921년 고하는 동아일보 제3대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그는 사장과 고문, 주필 등을 맡으며 동아일보와 운명을 함께했다. 그에게 신문은 단순한 사업체가 아니었다. 신문은 민족의 입이요 귀였고, 숨 쉬는 코이며 움직이는 손발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언론의 공기(公器)로서의 역할을 지키려 했다. 동아일보는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했고,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제창했으며, 브나로드운동을 통해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고하는 언론이 단순히 사건을 전달하는 기관이 아니라 민족의 생존 능력을 길러내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신문은 시대의 눈이어야 했다. 약자의 목소리여야 했다. 민족의 양심이어야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땄을 때, 동아일보는 그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했다.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편집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 잃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언론의 저항이었다. 그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을 당했고, 고하는 총독부의 압력 속에 사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물러났을 뿐 굴복하지는 않았다.
일제는 그에게 신사참배와 학도병 권유 등 대일 협력을 강요했다. 그러나 고하는 끝내 이를 거부했다. 그는 “동아일보는 내 입이요 내 귀며 호흡하는 코요 손과 발인데, 그 전부를 잘려버린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가”라는 취지로 항거했다. 언론의 입을 막아놓고 협력을 요구하는 것은 민족의 양심을 팔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고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광복 이후 고하는 또 다른 시대적 과제 앞에 섰다. 해방은 기쁨이었지만 동시에 혼돈이었다. 좌우 대립은 극심했고,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그림자는 한반도 위에 짙게 드리워졌다. 고하는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했고,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활동하며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길지 않았다.
1945년 12월 30일 아침, 그는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피격돼 생을 마감했다. 향년 55세였다. 고하의 죽음은 한 사람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단순한 비극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언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그는 권력 앞에서 굽히지 않았고, 민족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으며, 시대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다. 그의 저널리즘은 상업의 기술이 아니라 공공의 양심이었다.
오늘의 한국 언론은 고하 앞에서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사를 쓰는가. 클릭을 위해 쓰는가, 진실을 위해 쓰는가. 진영을 위해 쓰는가, 공동체를 위해 쓰는가. 인공지능(AI) 시대의 언론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속도와 효율을 갖게 됐다. AI는 기사를 빠르게 작성할 수 있고, 알고리즘은 독자의 취향을 정교하게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언론의 본령은 변하지 않는다. 사실을 확인하고, 권력을 감시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공동체의 방향을 밝히는 일이다. AI는 기사를 대신 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AI가 언론의 양심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알고리즘은 관심을 분석할 수 있지만 정의를 판단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AI 시대일수록 더 절실한 것이 고하의 정신이다. 자유와 책임, 민족과 세계, 사실과 양심, 언론과 공공성의 균형이다. 고하 송진우의 이름을 기리는 일은 단지 과거를 추억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의 언론이 다시 서야 할 자리를 확인하는 일이다.
인촌 김성수 선생과 함께 민족교육과 민족언론을 지켜낸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정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신문의 공적 책무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저널리즘의 본령이 오늘 우리 사회에 더욱 절실하다.
고하는 떠났다. 그러나 고하가 남긴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언론은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언론은 권력의 편도, 자본의 편도, 진영의 편도 아니어야 한다. 언론은 진실의 편에 서야 한다. 그것이 고하 송진우가 남긴 길이며, 오늘의 한국 언론이 다시 걸어야 할 길이다.
재단법인 고하송진우선생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국가보훈부와 동아일보가 후원한 이날 행사는 단순한 기념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언론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다시 묻는 자리였다.
현충관의 공기는 엄숙했다. 국민의례로 시작된 추모식은 약전 봉독, 추모식사, 추모사, 기념강연, 추모공연, 헌화와 분향, 묵념으로 이어졌다. 독립운동가 후손과 보훈 관계자, 학계와 언론계 인사, 시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해 고하의 삶을 되새겼다.
이날 현병철 고하자유민주연구원장은 “고하 선생이 남긴 자유와 책임, 평화와 공존, 통합과 민주주의 정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단순한 추모사의 문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의 한국 사회를 향한 준엄한 경고이자, 갈라진 시대를 향한 묵직한 성찰이었다.
고하는 언론인이었으나 단지 신문만 만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교육자였고 독립운동가였으며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이름 위에 놓인 가장 큰 이름은 ‘공인(公人)’이었다.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책임 앞에서 자신의 안위를 뒤로 미뤘고, 민족과 공동체의 운명을 먼저 생각했다.
고하 송진우 선생의 호 ‘고하(古下)’는 ‘옛것의 아래에 선다’는 뜻을 품고 있다. 스스로를 앞세우지 않고 역사와 전통 앞에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다. 이것은 단순한 겸양의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태도이며, 전통과 근대, 민족과 세계, 자유와 책임을 함께 보려 했던 근대 지식인의 정신이었다.
이날 추모식의 마지막 울림은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이자 고하 선생의 장손인 송상현 교수의 추도 메시지에서 더욱 깊어졌다. 송 교수는 고하의 삶을 단순한 가족사의 기억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독립을 위해, 광복 후에는 자유민주주의 건국을 위해 평생을 바친 분”이라고 회고하며, 선생이 지키고자 했던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적 자존의 가치를 다음 세대에도 온전히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립과 건국의 정신, 그리고 언론의 본령을 다시 새기는 시간이었다.
현충관을 나서는 참석자들의 발걸음이 무거웠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날 우리는 단지 한 사람의 언론인을 추모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언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있었던 것이다.
고하 송진우는 누구인가. 고하는 1890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신평이며, 호는 고하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고, 의병장 기삼연에게서 수학하며 나라 잃은 시대의 비애를 일찍 배웠다. 이후 신학문을 접한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올라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유학 시절 그는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동문수학의 차원을 넘어섰다. 그것은 시대를 함께 건너간 관포지교(管鮑之交)였다. 중국 춘추시대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처럼, 고하와 인촌은 서로의 뜻을 알고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며 민족교육과 민족언론의 길을 함께 걸었다.
인촌이 자본과 조직으로 민족교육과 언론의 기반을 세웠다면, 고하는 정신과 논리, 필봉으로 그 길을 지탱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역할을 맡았으나 목표는 하나였다. 식민지 조선의 민족정신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귀국 후 고하는 중앙학교 교감이 되었고, 이어 교장에 올랐다. 당시 중앙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었다. 그곳은 민족의식의 산실이었고, 3·1운동의 기운이 자라난 공간이었다.
고하는 김성수, 현상윤, 최린, 최남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그는 구속돼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법정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사실상 1년 반 가까운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감옥은 그의 신념을 꺾지 못했다. 1921년 고하는 동아일보 제3대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그는 사장과 고문, 주필 등을 맡으며 동아일보와 운명을 함께했다. 그에게 신문은 단순한 사업체가 아니었다. 신문은 민족의 입이요 귀였고, 숨 쉬는 코이며 움직이는 손발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언론의 공기(公器)로서의 역할을 지키려 했다. 동아일보는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했고,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제창했으며, 브나로드운동을 통해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고하는 언론이 단순히 사건을 전달하는 기관이 아니라 민족의 생존 능력을 길러내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신문은 시대의 눈이어야 했다. 약자의 목소리여야 했다. 민족의 양심이어야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땄을 때, 동아일보는 그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했다.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편집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 잃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언론의 저항이었다. 그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을 당했고, 고하는 총독부의 압력 속에 사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물러났을 뿐 굴복하지는 않았다.
일제는 그에게 신사참배와 학도병 권유 등 대일 협력을 강요했다. 그러나 고하는 끝내 이를 거부했다. 그는 “동아일보는 내 입이요 내 귀며 호흡하는 코요 손과 발인데, 그 전부를 잘려버린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가”라는 취지로 항거했다. 언론의 입을 막아놓고 협력을 요구하는 것은 민족의 양심을 팔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고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광복 이후 고하는 또 다른 시대적 과제 앞에 섰다. 해방은 기쁨이었지만 동시에 혼돈이었다. 좌우 대립은 극심했고,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그림자는 한반도 위에 짙게 드리워졌다. 고하는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했고,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활동하며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길지 않았다.
1945년 12월 30일 아침, 그는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피격돼 생을 마감했다. 향년 55세였다. 고하의 죽음은 한 사람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단순한 비극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언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그는 권력 앞에서 굽히지 않았고, 민족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으며, 시대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다. 그의 저널리즘은 상업의 기술이 아니라 공공의 양심이었다.
오늘의 한국 언론은 고하 앞에서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사를 쓰는가. 클릭을 위해 쓰는가, 진실을 위해 쓰는가. 진영을 위해 쓰는가, 공동체를 위해 쓰는가. 인공지능(AI) 시대의 언론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속도와 효율을 갖게 됐다. AI는 기사를 빠르게 작성할 수 있고, 알고리즘은 독자의 취향을 정교하게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언론의 본령은 변하지 않는다. 사실을 확인하고, 권력을 감시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공동체의 방향을 밝히는 일이다. AI는 기사를 대신 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AI가 언론의 양심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알고리즘은 관심을 분석할 수 있지만 정의를 판단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AI 시대일수록 더 절실한 것이 고하의 정신이다. 자유와 책임, 민족과 세계, 사실과 양심, 언론과 공공성의 균형이다. 고하 송진우의 이름을 기리는 일은 단지 과거를 추억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의 언론이 다시 서야 할 자리를 확인하는 일이다.
인촌 김성수 선생과 함께 민족교육과 민족언론을 지켜낸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정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신문의 공적 책무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저널리즘의 본령이 오늘 우리 사회에 더욱 절실하다.
고하는 떠났다. 그러나 고하가 남긴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언론은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언론은 권력의 편도, 자본의 편도, 진영의 편도 아니어야 한다. 언론은 진실의 편에 서야 한다. 그것이 고하 송진우가 남긴 길이며, 오늘의 한국 언론이 다시 걸어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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