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왕성이 왜 오랫동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지 생각해보면, 이 문제는 단순한 천문학의 영역을 이미 넘어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6년 국제천문학연합이 행성의 정의를 재정의하면서 명왕성을 왜성으로 분류한 결정은 과학적으로는 명확한 기준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 이후에도 이 논쟁이 반복해서 되살아나는 현상은 과학적 판단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명왕성 논쟁의 핵심에는 과학 바깥의 요소, 특히 국가적 기억과 정체성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왕성은 1930년 미국의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보에 의해 발견됐다. 이 사실은 단순한 발견 기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태양계의 행성 가운데 미국인이 발견한 유일한 행성이라는 점에서, 명왕성은 과학적 대상이면서 동시에 미국이라는 국가가 우주라는 영역에서 확보한 상징적 성취였다. 유럽이 오랜 기간 천문학 전통을 주도해 온 상황에서, 비교적 후발 주자였던 미국이 ‘행성’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과학사적 사건이자 국가적 자부심의 근거가 됐다. 이 때문에 명왕성은 단순한 천체가 아니라 ‘미국이 발견한 세계의 일부’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면, 2006년 국제천문학연합의 결정이 미국 사회에서 유독 강한 감정적 반발을 불러일으킨 이유도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명왕성의 지위 변화는 과학적 기준의 문제였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우리의 발견’이 외부의 기준에 의해 격하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국제천문학연합의 결정이 특정 국가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지만, 과학적 판단이 사회적 감정과 충돌할 때 그 해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이처럼 축적된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정치적 언어와 결합하기 시작한다. 도널드 트럼프의 “Make America Great Again”, 이른바 MAGA는 단순한 선거 구호를 넘어 하나의 시대적 정서를 형성했다. 이 구호의 핵심은 과거의 어떤 질서를 다시 회복하겠다는 선언이며, 그 안에는 잃어버린 위상에 대한 불안과 이를 되찾고자 하는 욕망이 동시에 담겨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구호가 구체적인 정책보다 감정의 언어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이제 여기에 명왕성이 겹쳐진다. 최근 재러드 아이작먼 NASA 국장이 “Make Pluto a Planet Agai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명왕성 논쟁은 단순한 과학적 재검토의 차원을 넘어 정치적 상징성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 문장은 명백히 MAGA를 연상시키는 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순간 명왕성은 더 이상 중립적인 과학 대상이 아니라 ‘되찾아야 할 것’으로 재해석된다.
물론 명왕성을 다시 행성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전적으로 비과학적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행성의 정의를 둘러싼 논쟁은 과학계 내부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의 궤도 중심 정의 대신 천체의 지질학적 특성과 내부 구조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는 일정한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으며, 이 기준에 따르면 명왕성은 다시 행성으로 분류될 여지도 있다. 따라서 이 논쟁을 단순히 감정과 정치의 산물로만 규정하는 것은 과학적 논의의 실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해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방식은 분명히 다르다. 많은 이들에게 명왕성은 과학적 정의의 대상이 아니라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아홉 번째 행성’으로 기억된다. 이 기억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일부로 자리 잡는다. 아홉 개의 행성으로 구성된 태양계는 이해하기 쉽고, 구조적으로 안정된 질서를 제공한다.
이 점에서 대중이 기억하는 ‘9개의 행성’ 체계와 과학적 분류 체계는 서로 다른 방식의 단순화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기억의 편의를 위한 단순화이며, 다른 하나는 이론적 일관성을 위한 단순화다. 문제는 이 두 단순화가 충돌할 때 발생한다.
명왕성 논쟁은 바로 이 충돌의 결과다.
이 논쟁을 지나치게 확대해 과학 부정주의의 사례로 연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명왕성의 지위는 기후 변화나 백신처럼 객관적 사실을 둘러싼 문제가 아니라, 분류 기준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논쟁이 보여주는 구조는 분명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학적 논쟁이 정치적 언어로 번역될 때, 그 복잡성은 사라지고 단순한 메시지만 남게 된다는 점이다.
“Make Pluto a Planet Again”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 사례다. 이 문장은 과학적 논의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지만, 동시에 논쟁의 본질을 단순화하고 감정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과학은 원래 느리고 복잡한 과정이지만, 정치의 언어는 빠르고 직관적이다. 이 두 영역이 만나는 지점에서 의미의 왜곡이 발생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결국 명왕성 논쟁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 하는가, 아니면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재구성하려 하는가. 이 질문은 천문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기술, 경제, 정치의 모든 영역에서 동일하게 제기되는 문제다.
명왕성은 여전히 태양계 외곽을 돌고 있다. 그 궤도도, 물리적 성질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기준과 해석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언제나 과학적 데이터뿐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감정, 그리고 때로는 정치적 언어 속에서 형성된다.
명왕성을 다시 행성으로 부를 것인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왜 그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는지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 이유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과학과 사회, 그리고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서로 얽혀 있는지를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
명왕성 논쟁은 결국 작은 천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발견’과 ‘정의’, 그리고 ‘소유’에 대한 이야기다. 누가 발견했는가, 누가 기준을 정하는가, 그리고 그 기준을 누가 받아들이는가라는 질문은 오늘날 글로벌 질서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반도체 규칙, 인공지능 윤리, 에너지 공급망까지 모두 같은 구조 속에 있다.
이런 점에서 명왕성은 가장 작지만 가장 멀리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우리는 무엇을 되찾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그 욕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 한, 명왕성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를 불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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