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소설 삼국지-역사와 문학이라는 경계선을 뛰어넘다

원철 스님
[원철 스님]



이십여년 만에 다시 중국 사천성 성도(成都) 무후사(武侯祠)를 찾았다. 그 사이에 지하철 무후사역(站)이 새로 생겼고 촉(蜀)나라 옛 거리를 재현했다는 금리(錦里)구역마저 경내지로 편입될 만큼 주변은 크게 확장·정비된 상태였다. 입구에는 표지석을 새로 만들고 붉은 글씨로 ‘삼국성지(三國聖地)’라고 크게 써놓았다. 그 앞에서 인증샷을 남기려는 관광객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그 대열에 우리 일행도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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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 성도(成都) 무후사 입구 삼국성지(三國聖地) 표지석'/ 사진 필자 제공] 


 
아시다시피《삼국지》는 역사책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말하는 삼국지는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책이다. 나관중(1330~1440)선생은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인지 그 경계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들면서 기가 막히게 버무리는 창작력을 발휘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소설적 허구가 역사적 사실까지 덮어버릴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픽션이 오히려 팩트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무조건 편들기를 일삼는 일부 삼국지 마니아들은 설사 픽션이라고 해도 팩트를 바탕으로 할 때는 ‘팩션’이라고 적극 옹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상상력의 결과로 인하여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수백년동안 천문학적 숫자로 증가한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작년(2025)여름 중경(重慶)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장강(長江)주변을 답사할 때 백제성(白帝城) 곁을 지나가게 되었다. 유비가 이릉(夷陵)전투에서 패배하여 그 충격으로 임종한 곳이라고 가이드는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배가 지나가듯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승산없는 전쟁이라고 판단한 제갈공명은 출병을 뜯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도원결의로 형제가 된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겠다는 독단적 감정으로 출전한 결과였다. 이미 엎지러진 물이지만 참모의 충언을 무시했던 과오를 엄청 후회했다. 이후 뒷일은 모두 공명에게 일임했다. 어쨋거나 역사적으로도 소설적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장소이지만 정박시설을 갖추지 못한 탓인지 처음부터 아예 답사 일정에는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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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 낙산 출신인 곽말약(郭沫若1892~1978)의 글씨다. 그는 시간날  때마다 무후사를 찾았다고 한다./사진 필자 제공] 
 
‘삼국성지’에는 유비의 무덤인 혜릉(惠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히 ‘무후사’로 불린다. 무후는 제갈공명의 시호다. 도대체 이 구역에서 누가 진짜 주인인지 알 수 없도록 누군가 주물러 놓았다. 하긴 유비의 묘자리도 제갈공명이 잡았다고 하니 이미 두 사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다. 뒷사람들은 동일한 공간에 임금과 신하를 함께 모시면서 영당(影堂)만 달리하여 제사를 지냈다. 전례가 없는 군신합사(君臣合祀)의 사당을 만든 것도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친 김에 더욱 범위를 넓혀 삼국지에 등장하는 어지간한 인물들은 전부 모았다. 가이 ‘삼국성지’라 불릴만 하다.
 
당연히 장비 관우의 형상도 전각(殿閣) 한 켠에 자리잡았다. 직설적 저돌적인 장비 스타일은 사찰의 수호신 사천왕(四天王)의 판박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비슷했다. 패션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모양과 표정까지도 그대로 답습했다. 단순했던 장비의 삶과는 달리 관우는 후대에도 계속 이미지가 업그레이드 되는 과정을 밟았다. 소설적 상상력도 한 몫 했지만 그것은 지혜로운 관우의 품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관우가 전사한 뒤에 머리가 없는 혼령의 상태로 보정(普淨)선사를 찾아가 자기머리를 돌려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스님은 “그렇다면 자네가 죽인 사람들의 머리는 어떻게 돌려줄 것이냐?”고 반문한다. 그 한 마디에 관우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신(神)의 반열에 오르면서 전쟁터에선 군신(軍神)으로 추앙되었고 물류(物流)가 있는 곳에선 재신(財神)으로 모셨다. 무덤의 호칭도 왕의 무덤인 릉(陵)보다도 높은 등급인 ‘림(林)’자를 붙여 관림(關林)이라고 불렀다. 공자의 무덤만 공림(孔林)이라고 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가이 관우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겠다. 호칭 역시 ‘관공(關公)’으로 일원화할 정도였다.

유비와 공명이라는 두 인물 때문에 많은 사자성어가 생겼다. 은둔하고 있는 공명의 누추한 초막을 유비가 세 번 찾았다는 삼고초려(三顧草廬)는 오늘날 인재를 발탁할 때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언이 되었다. 사당에 걸린 ‘명량천고(明良千古)’ 현판은 ‘명군양신(明君良臣) 유전천고(流傳千古)’라는 여덟 글자를 네 글자로 줄인 것이다. 눈 밝은 임금과 좋은 신하가 만나면 그 업적과 명성을 영원히 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역시 유비와 공명의 관계를 제대로 묘사한 언어라 하겠다. 또다른 현판은 ‘명수우주(名垂宇宙)’였다. 이름을 온천하에 떨친다는 제갈공명에 대한 찬탄이다. 제갈대명수우주(諸葛大名垂宇宙)에서 앞의 세 글자를 생략한 것이다. 원문은 두보(杜甫)의 시(詩)에서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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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하순 무후사 경내에는 목련꽃이 화사하다./사진 필자 제공]

 
2026년 2월 마지막 날임에도 불구하고 사당 경내에는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남쪽으로 비행기를 몇시간 타고 내려 온 덕분에 미리 봄맞이를 한 셈이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씨다. 거기에 더하여 전체적으로 무겁고 가라앉은 느낌을 주는 것이 사당이다. 꽃은 이 구역을 화사한 분위기로 반전시키면서 참배객을 오래 머물도록 만들었다. 봄꽃은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있는 까닭이다. 이내 푸른 대나무와 붉은 벽이 양쪽으로 길다랗게 이어지며 대비감을 보여주는 길이 나타났다. 유비의 묘로 가는 길은 임금에 대한 예우를 제대로 갖추고자 정비했다. 길은 단아했지만 동산만한 봉분 위에서 나무들은 제멋대로 자라고 있다.
 
삼국성지 방문을 기념하면서 얼마 전에 출판된《정사 삼국지》8권을 주문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일단 책꽃이에 진열했다. 만만찮은 부피 임에도 불구하고 선인들은 한 번이 아니라 반드시 세 번 정도 반복해 읽어야 할 명저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단호한 어조로 정리한 속담도 오늘까지 전해진다.
“삼국지를 한 번도 읽지 않았다는 사람은 친구삼지 말라.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 역시 가까이 하지 말라.”
인문학 역사학에 무지한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나친 권모술수를 도모하는 이도 가까이 하지 말라는 중도적 처세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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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열릉(漢昭烈陵   유비 묘)가는 길/사진 필자제공]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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