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타임스(FT)는 15일 납사 공급 차질이 겹치면서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석유화학업계의 위기가 더욱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의 석유화학 업체들은 전쟁 이전부터 중국 경쟁업체들의 만성적인 설비 과잉으로 가동률을 낮추고 있었는데, 이번에 납사 공급 부족까지 겹치며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유류 관련 정보업체 스파르타 커모디티스 데이터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은 납사 사용량의 약 3분의 2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수입 납사 가운데 페르시아만에서 들여오는 물량 비중은 한국이 약 60%, 일본이 약 70%에 달한다.
납사는 원유를 증류하는 과정에서 추출되는 탄화수소 혼합물로 플라스틱 등의 핵심 원료다.
실제로 가격도 급등했다. S&P 글로벌 에너지에 따르면 지난달 이후 납사 가격은 50% 급등해 톤당 875달러(약 131만원)에 달했다. 여기에 이란의 보복 공격으로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선박 통행이 사실상 차단되면서 공급 확보 자체도 어려워진 상황이다.
이에 따라 아시아 전역의 석유화학 시설들이 생산량 감축에 들어갔다. 한국 최대 단일 에틸렌 생산 업체인 여천NCC는 지난주 "불가항력"(force majeure) 상황을 선언하고 최소 가동 수준으로 생산량을 줄였다고 밝혔다.
최근 사흘 동안 롯데케미칼과 LG화학도 고객사들에게 불가항력 사유로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통보했다. 아직 불가항력을 선언하지 않은 업체들 역시 가동률을 기존 80∼90% 수준에서 약 60% 수준으로 낮추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에서도 생산 차질이 나타나고 있다. 화학업체 미쓰비시케미칼과 미쓰이화학이 생산량을 줄였으며, 이데미츠코산은 공급 부족이 지속될 경우 두 곳의 시설 가동을 중단할 수 있다고 고객들에게 경고했다.
씨티그룹의 일본 소재 애널리스트들은 4월 중순까지 시장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복수의 에틸렌 시설이 생산 감축이나 가동 중단 위험에 처할 것"이며 에틸렌, 프로필렌, 부탄 등 제품들이 타격을 받기 시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FT는 한국과 일본이 그동안 중국과의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어왔다고 분석했다. 중국은 정유와 석유화학을 통합한 대규모 단지를 구축해 경쟁력을 높인 반면 한국과 일본 업체들은 원료 및 전력 비용 상승, 내수 시장 축소, 통화 약세 등 복합적인 압박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또 중국은 자체 원유 정제 능력과 러시아를 대체 공급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여건 덕분에 이번 위기에서 어느 정도 보호받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은 대러시아 제재를 준수해야 해 러시아 자원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 정부는 치솟는 에너지 가격을 억제하기 위해 해상에서 발이 묶인 러시아산 원유를 각국이 구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고 지난 12일 밝혔다.
업계에서는 납사가 그동안 정유업체들의 우선 생산 품목이 아니었다는 점도 공급 부족을 키운 요인으로 지목된다. 조사업체 ICIS의 분석가 아자이 파르마르는 제트기 연료, 디젤유, 난방유 등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이 우선시되면서 납사는 주요 제품군으로 취급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저장시설 가용성도 낮은 편이었다고 설명했다.
재고 상황도 넉넉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한국의 납사 재고는 약 2주분 수준이다. 씨티그룹은 일본의 납사 재고를 약 20일분으로 추산했는데 이는 석유화학 업체들이 통상 보유하는 재고 수준과 비슷한 수준이다.
한국과 일본 정부는 석유화학 산업의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해 구조조정에도 나서고 있다. 양국은 국방과 공급망 회복탄력성 측면에서 석유화학 산업이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실적이 부진한 공장 폐쇄와 통합을 추진해 왔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8월부터 생산 능력을 약 4분의 1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석유화학 기업들의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올해 1월 미쓰비시케미칼, 미쓰이화학, 아사히카세이가 서일본 지역 에틸렌 생산을 통합해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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