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자의 영화 이야기 12 | 인간 · 문화 · 자연]영화 '왕과 사는 남자'단종과 평민 사이의 신의와 사랑

  • K-영성(K-Spirituality), 그 원류에서 나온다

한  시대의 문화는 단지 기술과 산업의 산물이 아니다. 그 사회가 오랜 세월 축적해 온 정신과 가치가 문화라는 그릇 속에서 비로소 형상을 얻는다. 그래서 한 편의 영화가 시대를 움직일 때 그것은 단순한 흥행을 넘어 한 민족의 내면에 흐르는 정신을 드러내는 사건이 된다.


최근 극장가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이 영화는 조선의 비운의 왕 단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역사적 비극 자체가 아니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신의와 사랑, 그리고 정의의 감정이다.

단종이 유배된 청령포의 실경을 그린 청령포도자료-한국학중앙연구원
단종이 유배된 청령포의 실경을 그린 청령포도[자료-한국학중앙연구원]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던 왕과, 그 왕을 지켜보는 평민 사이에 흐르는 인간적 연대가 오늘의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것은 단순한 사극의 감동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정신적 뿌리를 다시 묻는 문화적 질문이다.



이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학자의 통찰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한양대학교 수학과 교수이자 인문학자로 활동했던 김용운 박사는 동아시아 문명의 구조를 비교 연구한 학자였다. 그는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자연 환경과 정치 구조의 관점에서 분석하며 흥미로운 결론을 제시했다.


한국은 민초의 나라, 중국은 천자의 나라, 일본은 천황의 나라.


김용운 박사의 저서 『풍수화(風水火)』에 따르면 한국 문명의 중심에는 의병과 승병 등의 충절,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민중의 역사적 에너지가 자리하고 있다.
 

반면 중국 문명의 중심에는 치수(治水)가 있었다. 황하와 장강이라는 거대한 강을 다스리는 권력이 곧 국가 권력이었고, 그 권력은 천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물을 다스리는 힘이 정치 권력의 핵심이 되었고, 그래서 중국은 역사적으로 강력한 중앙 권력이 지배하는 문명으로 발전했다.



일본은 또 다른 자연 환경 속에서 형성된 문명이다. 일본 열도는 화산과 지진, 해일이라는 자연의 격렬한 힘과 늘 함께 살아야 하는 땅이었다. 이러한 자연 환경 속에서 사회를 통합하는 상징적 권위가 필요했고, 그 결과 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 사회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한국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김용운 박사는 한국을 ‘신바람’으로 상징되는 민초의 나라라고 규정했다. 이 땅의 역사에서는 백성의 정서와 공동체의 에너지가 정치와 문화를 움직이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왕이 존재했지만 왕권보다 더 강하게 작용했던 것은 민심과 도덕적 여론이었다. 조선의 선비 문화, 의리와 절개를 중시하는 가치관, 그리고 3·1운동을 시작으로 근대 이후 민주주의가 비교적 빠르게 자리 잡은 것도 이러한 역사적 토양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이 영화는 권력의 이야기가 아니라 왕과 평민 사이의 인간적 신의를 중심에 놓는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단종은 정치적 음모 속에서 왕좌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된다. 역사 속에서 단종은 비극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 비극을 단순한 왕실 권력 투쟁으로 그리지 않는다. 대신 어린 왕을 지키려는 평민들의 마음,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의리의 감정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왕을 향한 충성이라는 말은 자칫 봉건적 가치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감정은 권력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의에 가깝다.



어린 왕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정치적 계산이 없다. 그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사랑이 있을 뿐이다. 많은 관객이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오늘의 젊은 세대, 이른바 MZ세대가 이 영화에 강하게 반응하는 현상은 의미심장하다.



이 세대는 무엇보다 공정과 정의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들에게 권력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평가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이 영화 속에서 그들은 권력의 위엄이 아니라 정의와 신의의 감정을 발견한다.



억울한 왕을 지키려는 민초들의 마음이 바로 그들이 추구하는 공정과 정의의 감정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흥행이 한국을 넘어 북미 시장에서도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흥미롭다. 만약 이 흐름이 이어진다면 한국 사극 영화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흥행 기록을 남길 가능성도 거론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다.


이 영화가 세계에 전달하고 있는 것은 한국 문화의 깊은 정신이다.

오늘 세계는 이미 K-팝과 K-드라마, K-시네마를 통해 한국 문화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의 진정한 힘은 콘텐츠의 형식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정신에서 나온다.


한국 문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정의와 신의, 그리고 공동체의 정서가 있었다.

힘보다 도리를, 권력보다 인간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문화. 그것이 한국 정신문화의 핵심이다.


필자는 이것을 K-영성(K-Spirituality)이라고 부르고 싶다.

K-영성은 인간의 신의와 정의, 공동체적 사랑을 중심에 둔 정신 문화다.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과 천부경의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정신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그것은 특정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중심으로 한 가치 체계다. 약자를 보살피고 정의를 지키며 인간 사이의 신의를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바로 그 핵심이다.


이 정신은 한국 문화의 깊은 원류에서 나온다.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에서 시작해 조선 선비의 의리와 절개, 그리고 근대 민주주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했던 가치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K-팝과 K-콘텐츠가 세계 문화 시장을 흔들었다면 다음 단계는 영성 문화의 확장, 곧 K-영성(K-Spirituality)의 세계화일 것이다.


그 전진 기지는 이미 우리 역사 속에 존재한다.


강원도 영월 청령포는 단종이 유배되어 외로운 세월을 보낸 곳이다. 권력의 비극을 넘어 인간의 신의를 기억하는 상징적 장소다.

전북 임실 노산 일대에는 단종 때 도승지를 지냈던 곽도가 세조 즉위 이후 낙향해 살았다는 전승이 남아 있다.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인간의 신의를 지키려 했던 삶의 흔적이다.


또 태백산에는 탄허 스님이 1955년 비문을 쓴 ‘조선국 태백산 단종대왕 지비’가 서 있다. 이곳은 단종의 비극을 기억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의리와 정의를 기리는 상징적 공간이다.

태백산 단종비각사진태백시
태백산 단종비각[사진=태백시]


이 세 곳은 단순한 역사 유적이 아니다.


그곳은 한국 정신문화의 살아 있는 현장이다.

앞으로 우리는 영월 청령포와 임실 노산, 태백산 단종비각을 잇는 역사 문화 축을 세계적인 K-영성 관광 거점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문화는 결국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신의와 정의, 그리고 진실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보여주는 단종의 이야기는 단지 과거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폭력 속에서도 인간의 신의와 사랑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믿음의 이야기다.


그 믿음이 바로 한국 문화의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이 앞으로 세계가 만나게 될 새로운 문화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K-영성(K-Spirituality).

그 원류는 이미 우리 역사 속에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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