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북창동 뒷골목의 해남빌딩 2층에 글로벌 정유사 관계자와 원유 트레이더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이란 공습 이후 중동 정세가 급격히 흔들리면서 원유 운송 시장에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들이 찾는 곳은 세계 최대 규모의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선단을 운영하는 한국 해운사, 장금상선이다.
중동 전쟁이 촉발한 국제 원유 운송 시장의 변화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호르무즈해협을 둘러싼 긴장이 높아지면서 페르시아만에 머물러 있는 VLCC가 늘어났고, 글로벌 정유사들은 원유를 안정적으로 운송할 선박을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그 결과 세계 최대 VLCC 선단을 보유한 장금상선의 존재감이 급격히 커지고 있다.
현재 장금상선이 보유하거나 운용하는 VLCC는 약 130~150척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 VLCC 선박 약 880척 가운데 14~17%에 해당하는 규모다. 단일 회사가 VLCC 시장에서 10% 이상의 점유율을 확보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사실상 장금상선이 세계 원유 운송 시장의 핵심 플레이어로 떠오른 셈이다.
전쟁 이후 운임은 폭등했다. 해운업계에 따르면 장금상선이 최근 글로벌 정유사에 제시한 중동 항로 VLCC 용선료는 하루 약 80만 달러 수준으로 알려졌다. 우리 돈으로 약 11억 원이 넘는 금액이다. 불과 1년 전과 비교하면 수십 배 상승한 수준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런 상황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장금상선은 이미 코로나19 이후 해운 시장이 침체 국면에 접어들던 2022년부터 중고 VLCC 매입을 공격적으로 늘렸다. 당시 해운 시장은 전반적으로 불확실성이 컸고 선박 가격도 비교적 낮은 수준이었다. 많은 해운사들이 투자를 보류하거나 선단 축소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장금상선은 다른 선택을 했다. 전염병, 전쟁, 지정학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해운 운임이 폭등하는 산업 특성을 감안해 선제적인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이 전략은 결국 시장 변동성 속에서 강력한 경쟁력으로 돌아왔다. 장금상선은 지난해 말 중고 VLCC 여러 척을 추가로 매입했고, 중동 긴장이 고조되기 직전에도 추가 선박을 확보했다. 그 사이 중고 VLCC 가격은 급등했다. 5년 된 중고 VLCC 가격이 신조선 가격보다 높아지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이후 약 17년 만에 처음 있는 일로 평가된다.
이 같은 흐름은 기업가정신의 본질을 보여준다.
기업가정신이란 단순히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용기가 아니라 미래를 읽고 위험을 감수하는 판단력이다.
장금상선의 성장 과정도 이를 잘 보여준다. 회사는 1989년 한국 동남아해운과 중국 시노트란스의 합작으로 설립됐다. 이후 1998년 외환위기 당시 정태순 회장이 중국 측 지분을 인수하면서 사실상 한국 기업으로 재편됐다. 위기의 순간에 내려진 결단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장금상선은 컨테이너선과 유조선을 동시에 확대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특히 VLCC 분야에서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며 세계 최대 규모의 선단을 구축했다.
원유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유전만이 아니다.
그 원유를 실어 나르는 운송 능력 역시 막대한 힘을 갖는다.
19세기에는 석탄이 세계 경제를 움직였고, 20세기에는 석유가 국제 정치와 경제의 핵심 에너지로 자리 잡았다. 21세기에도 석유는 여전히 세계 산업 구조의 중심에 있다. 다만 이제는 유전뿐 아니라 운송망과 물류 능력도 에너지 패권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장금상선은 원유 운송 시장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회사 실적 역시 상승세다. 장금상선은 코로나 시기였던 2022년 매출 약 4조9000억 원, 영업이익 약 1조8000억 원을 기록했다. 중동 긴장이 장기화될 경우 올해도 높은 수익성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기업 규모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자산 규모는 약 19조 원 수준으로 늘었고 재계 순위도 30위권 초반까지 올라왔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해운사가 한국 경제의 핵심 기업 가운데 하나로 부상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기업의 경쟁력은 화려한 건물에서 나오지 않는다. 북창동의 낡은 건물에서 세계 원유 운송 시장을 움직이는 기업이 등장한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라 전략이며, 규모가 아니라 판단이다.
세계 경제는 언제든 전쟁과 위기로 흔들린다. 이런 시대일수록 기업가정신의 가치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불확실성 속에서 기회를 읽고 준비한 기업만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중동 전쟁은 세계 에너지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그러나 그 혼란 속에서 한국의 한 해운 기업은 오히려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내고 있다.
장금상선의 이야기는 결국 기업가정신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질문이다.
위기는 언제나 존재한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기업의 통찰과 결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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