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 앞에 작아진 일본의 '원조 외교'... 돈은 풀었지만 힘은 빠졌다

  • 서울 지하철·중국 공항 깔아주던 '큰 손'은 옛말... 실질 가치 20% 증발에 속수무책

사진AFP연합뉴스
[사진=AFP·연합뉴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이 국제사회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총칼이 아닌 '돈'이었다. 정부개발원조(ODA)는 일본의 평화 국가 이미지를 대내외에 확산시키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었고 동남아시아 등 세계 각지에 '일본의 든든한 우군'을 확보할 수 있는 소프트파워의 원천이었다.

그 위력은 실로 막강했다. 과거 한국의 지하철 건설 현장에도 일본의 엔차관(유상 원조)이 투입됐다. 중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1979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대중(對中) ODA는 베이징 서우두공항과 상하이 푸동공항 같은 핵심 인프라를 세우는 종잣돈이 됐다. 일본이 40년간 중국에 쏟아부은 돈만 약 3조6000억 엔(약 32조 원). 이 지원은 불과 4년 전인 2022년 3월이 되어서야 완전히 종료됐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원조로 성장한 중국은 이제 세계 주요 2개국(G2)이 되어 일본을 위협하고 있고, 수십 년간 일본 외교를 지탱해 온 ODA는 기록적인 엔저라는 복병을 만나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다카이치 내각은 5년 만에 ODA 예산을 증액하며 승부수를 띄웠지만, 시장의 냉혹한 환율 계산법 앞에 '원조 대국'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다.

◇ 엔저가 부른 '원조의 눈물'… 10년 새 실질 가치 20% 증발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분석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엔화 가치 하락으로 인해 일본 ODA의 구매력은 처참하게 쪼그라들었다. 2015년 달러당 121엔 수준이던 환율이 현재 150엔대까지 치솟은 가운데 엔화로 표기된 예산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이 달러로 환산한 실질 원조 규모는 앉은 자리에서 20%나 삭감된 셈이다.

과거 한국과 중국에 철도와 공항을 지어주던 시절의 구매력은 사라졌다. 시에라리온 변전소 건설 등 해외 인프라 사업 비용은 엔저에 자재비 폭등까지 겹치며 당초 계획보다 40% 이상 뛰었다. 결국 다른 지원 예산을 헐어서 메꾸는 '돌려막기'가 벌어지고 있다. 아나 비알디 세계은행 전무이사는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원조 삭감 기조 속에 엔저까지 겹치며 전 세계적으로 ODA 가뭄이 심화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 다카이치 내각의 고육지책… '개발' 줄이고 '안보' 늘렸다

위기감 속에 일본 외무성은 2026년도 예산안을 전년 대비 대폭 늘린 8170억 엔으로 편성했다. 사상 첫 '8000억 엔 시대'의 개막이다. 주목할 점은 돈의 흐름이 변했다는 것이다. 우방국 군대에 방위 장비를 무상 제공하는 '정부 안전보장 능력강화 지원(OSA)' 예산은 전년의 2배 이상인 181억 엔으로 폭등했다. 이는 최근 중앙아시아 5개국과의 정상회담에서 확인된 '카스피해 물류 루트' 확보 등, 순수 구호보다는 철저히 국익과 안보 논리에 입각한 '전략적 원조'로 태세 전환을 했음을 시사한다.

◇ "내 코가 석 자인데"... 싸늘한 여론과 딜레마

정부가 지갑을 열었지만, 일본 내 시선은 곱지 않다. 최근 내각부 조사에서 "ODA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는 응답은 22.6%에 그쳐 10년 중 최저치를 기록했다. 자신들이 키운 중국이 안보 위협으로 돌아오는 현실을 목격한 일본 국민들에게, 고물가 속 대외 원조는 더 이상 '당위'가 아닌 '낭비'로 비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행정의 비효율까지 도마 위에 올랐다. 최근 회계검사원은 일본국제협력기구(JICA)의 ODA 적립금 중 약 58억 엔이 5년 이상 집행되지 않고 방치된 사실을 적발했다. 예산 부족을 외치면서 정작 있는 돈도 못 쓰는 모순은 '원조 무용론'에 기름을 붓고 있다.

마이클 시퍼 전 미국국제개발처(USAID) 아시아담당 부국장은 "개발원조는 자선이 아니라 국익을 위한 투자"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엔저라는 거시 경제 변수가 외교력을 잠식하고, 고립주의 여론이 정책의 발목을 잡는 악순환 속에서 일본 정부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실용외교를 앞세워 경제력에 걸맞은 국제적 기여를 위해 ODA 예산을 늘리고 있는 한국도 이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않다. 통화 가치가 뒷받침되지 않는 외교는 그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는 일본의 사례는, 원화 변동성에 노출된 한국에 무거운 시사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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