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남긴 말이다. 장소, 날씨, 몸 상태 등 하나하나가 모여 '분위기'를 만든다는 의미다. 영화도 마찬가지. 그날의 기분, 나의 경험이 영화의 '평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최씨네 리뷰'는 필자의 경험과 시각을 녹여 관객들에게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일상적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영화 '넘버원' 스틸컷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엄마, 가족, 그리고 집밥. 단어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이 키워드들은 한국 영화계의 영원한 '치트키'인 동시에, 때로는 관객을 주저하게 만드는 거대한 벽이 되기도 한다. 특히 설 연휴를 겨냥한 가족 영화라는 타이틀을 마주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내세우는 방어기제는 '또 최루성 신파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영화 '넘버원'에 대한 예단 역시 그 지점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본 '넘버원'은 관객의 감정을 쥐어짜는 조급함을 버리고 대신 우리의 삶을 조용히 비추는 거울을 택한다.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눈앞에 알 수 없는 숫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숫자가 줄어들수록 죽음이 가까워진다는 가혹한 진실을 알게 된 하민(최우식 분)의 평범했던 일상은 그날로 뒤집힌다. 엄마 은실(장혜진 분)이 차려내는 정성 어린 집밥은 이제 하민에게 사랑이 아닌 공포의 카운트다운이다. 엄마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온갖 핑계를 대며 밥상을 밀어내는 아들과 그런 아들을 위해 더 지극정성으로 밥을 짓는 엄마. 영화는 사랑할수록 멀어져야만 하는 두 사람 사이의 서글픈 아이러니와 인물들 사이의 미세한 공기의 변화를 포착한다.
우와노 소라의 일본 소설 '어머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328번 남았습니다'를 원작으로 한국적인 '밥상 머리' 정서를 덧입혀 완성도를 높였다.
영화 '넘버원' 스틸컷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 '거인', '여교사' 등을 통해 인물의 내면과 감정의 심연을 집요하게 파헤쳐온 김태용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그 날 선 시선을 '따뜻한 이해'로 치환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신파의 늪에 빠지지 않는 방식이다. 본래 버석하고 예민한 감성을 다뤄온 감독답게 그는 자칫 과해질 수 있는 슬픔의 순간마다 의도적으로 제동을 건다. 감정이 북받쳐 오를 법한 대목에서 눙치듯 유머를 섞어 넘기거나 인물의 슬픔을 전시하기보다 일상의 소소한 소음 속에 묻어버리는 식이다. 덕분에 대사는 관념적인 문어체에 머물지 않고 철저히 생활에 밀착되어 있으며 그 투박하고 일상적인 톤이 오히려 영화의 진심을 단단하게 지탱한다. 우리가 걱정하던 '신파의 습격' 대신, 인물의 내면을 예리하게 파고들던 김태용식 촉각이 가족이라는 보편적 서사 안에서 영리하게 작동한 결과다.
로케이션의 활용 역시 탁월하다. 서울과 부산이라는 두 도시의 대비는 작품이 지닌 상반된 감성을 대변한다. 하민이 은실과 시간을 보내는 부산은 따뜻하고 일상적인 정서로 하민이 려은(공승연 분)과 새로운 출발을 꿈꾸는 서울은 치열한 사회생활의 공간으로 그려내 각 지역의 특수성을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특히 부산 출신인 김 감독은 소고기뭇국과 콩잎절임 등 지역 고유의 음식을 단순한 소품이 아닌 정서적 매개체로 활용하는 한편 감독과 배우의 추억이 깃든 맛집들을 로케이션으로 채워 현장감 넘치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영화 '넘버원' 스틸컷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배우들의 연기는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치트키다. '기생충'에서 모자로 호흡했던 장혜진과 최우식은 이번 작품에서 한층 깊어진 앙상블을 보여준다. 최우식은 비밀을 품은 채 일상을 버텨내는 하민의 내면을 특유의 담백한 정서로 풀어내며 관객의 감정에 스며들고 장혜진은 아들이 서운하면서도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엄마 은실의 얼굴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다. 여기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아는 단단한 인물 '려은' 역의 공승연은 하민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주며 서사를 풍성하게 채운다.
작품은 자극적인 양념으로 미각을 마비시키는 화려한 성찬이 아니라 슴슴하지만 속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집밥'의 정서를 닮아 있다. 감정이 요동치는 극적인 장치에 기대기보다 담담한 호흡으로 일상의 소중함을 복기하게 만드는 영화의 태도는 퍽 담백하다. 관객을 울리겠다는 강박을 내려놓은 자리에 스며든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통곡보다 깊은 여운과 위로다. 오는 2월 11일 극장 개봉. 러닝타임은 104분 관람 등급은 12세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