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對)한국 통상 압박이 관세를 넘어 비관세 장벽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한국산 제품 25% 관세’ 시간표가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농식품 교역, 온라인 플랫폼 규제 등 한국 제도·규제 전반이 협상 테이블에 오르며 정부 부담이 커지고 있다.
9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주 방미한 조현 외교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이 (대미) 전략 투자뿐 아니라 비관세 장벽 관련 사안에서도 진전된 입장을 조속히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 같은 미국 측 요구를 특정 부처 차원의 사안이 아닌 범정부 차원의 협상으로 규정하고 총력 대응에 나서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비관세 장벽과 관련한 권한은 산업부 단독이 아니라 재정경제부, 농림축산식품부, 청와대 등과 협의해 범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며 “어느 한 부처가 단독으로 결정하거나 추진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고 말했다.
한·미 양국이 지난해 11월 공개한 한·미 정상회담 공동 설명자료(조인트 팩트시트)에는 △미국산 연방자동차 안전기준 폐지 △농·생명공학 제품의 규제 승인 절차 효율화 △미국산 원예작물에 대한 요청을 전담하는 ‘미국 데스크’ 설립 △미국산 육류·치즈에 대한 시장 접근 유지 등 내용이 포함됐다.
특히 미국산 사과 수입 가능성은 국내 농가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안이다. 현재 미국산 사과는 전체 검역 8단계 중 2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미국 전담 데스크가 설치되면 검역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농협중앙회 미래전략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산 후지 사과가 국내에 들어오면 판매 가격은 ㎏당 4440원으로 최근 5년간 국산 사과(상품 기준) 도매시장 평균가인 6050원 대비 73% 수준이다. 이는 지난해 1~8월 평균 가격(8670원)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사과 농가를 중심으로 미국산 사과 수입이 본격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미국산 감자 수입 확대와 미국산 소고기 월령 완화 가능성 역시 농업계에 불안을 키우고 있다. 미국산 감자가 수입되면 국산 감자 가격보다 20~30% 낮은 수준으로 유입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또 쌀과 소고기처럼 국민 정서와 직결된 품목은 단순한 통상 논리를 넘어 정치·사회적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농업 분야와 함께 디지털 분야 역시 비관세 장벽 논의의 또 다른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쿠팡 사태 이후 온라인플랫폼 공정화법(온플법), 망 사용료 부과 논의 등 국내에서 규제 필요성이 커졌으나 미국은 자국 기업 보호를 명분으로 한국의 규제 움직임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 같은 갈등의 배경에는 한국 온라인 플랫폼 시장의 급격한 성장과 높은 시장 집중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규제가 지연되거나 무력화되면 중소 판매자 보호, 소비자 선택권 강화 등 국내 정책 목표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전문가들은 대미 투자 이행 지연을 계기로 시작된 협의가 비관세 장벽 전반으로 확산되고 나아가 기존 합의에 대한 이행 압박이나 추가 제도 개선 요구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허정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은 비관세 장벽이 높다는 불만이 큰 만큼 관련 요구를 계속 제기할 수 있다”며 “정부가 선제적으로 적극 대응하는 것이 오해를 줄이고 파급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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