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와 증시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지정학적 리스크’ 문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한국 상장기업의 주식 가치평가 수준이 유사한 외국 상장기업에 비해 낮게 형성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주주환원 정책, 기업지배구조, 회계투명성 등에서 세계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 한국경제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정학적 리스크는 지리적·정치·경제 요인이 군사·외교 갈등으로 표출돼 금융·실물경제에 불확실성과 비용을 키우는 위험을 말한다.
지금은 피아구분 없이 관세폭탄을 퍼붓는 ‘트럼프 리스크’가 많은 나라들에게 가장 큰 지정학적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는 트럼프 리스크뿐만 아니라 북한과 관련한 지정학적 리스크도 수시로 부각한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지면 투자자들이 위험회피(risk-off)로 자금을 안전자산으로 이동하면서 원화가 달러 대비 약세(원·달러 환율 상승)로 움직이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한다. 북한이 핵 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 국지도발을 감행하면 주가와 환율이 요동치는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높아진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연일 주가가 상승하는 등 그동안 저평가 됐던 한국경제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다. 2023년 말부터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론’에 따라 남북관계를 단절하고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고 주장했다. 윤석열 정부 시기 평양에 무인기를 보냈을 때도 북한은 꿈쩍하지 않았다. 두 국가 선언 이후 북한은 지정학적 리스크를 높일 수 있는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등 전략도발을 자제하며 정세관리를 하고 있다. 북한이 대남 무시정책을 펴고 있는 지금은 지정학적 리스크가 해소된 듯한 착시현상마저 나타난다.
핵무기는 힘의 균형을 잡거나 우위를 확보하여 전쟁을 억제하는 ‘절대무기’이지만, 실전에서의 사용은 종말을 각오해야 한다. 우크라이나전쟁에서 세계최강 핵보유국인 러시아가 쿠르스크 지역을 점령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북한군의 도움으로 탈환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핵무기 사용은 쉽지 않다. 핵무기 사용은 상호확증파괴를 불러오기에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여러 종류의 핵무기를 가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전쟁에서 핵공격을 위협하며 서방의 전투병 파병은 막았지만 정작 사용하지 못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이래 현재까지 전장에서 핵무기가 사용된 적은 없다. 인류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 가공할만한 방사능 누출의 피해를 목격했다.
핵보유국의 경우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핵무기를 보유하더라도 사용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스라엘은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NCND)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핵개발 의혹이 불거진 이후 핵 개발의 거의 모든 공정을 공개해 왔다. 북한은 미국의 핵물리학자인 지그프리드 해커 박사를 초청하여 플루토늄 추출물과 우라늄농축시설을 보여주기도 했다. 북한 언론에도 핵탄두와 핵시설을 공공연히 노출했다.
북한이 핵능력을 고도화하는 동안 미국은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CVID)’를 주문처럼 외우며 ‘전략적 인내’로 일관하다가 북핵 해결의 결정적 기회를 여러 차례 놓쳤다. 북한이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핵개발 과정과 공정을 공개했음에도 미국은 ‘통제 가능한 위협’ 정도로 인식하고 금지선(red line)을 설정하지 않았다. 북한이 전통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유엔과 개별국가들의 제재도 북한의 핵개발을 막지 못했다. 북한이 2023년 12월 ‘적대적 두 국가관계’ 선언 이후 ‘대한민국 괴멸’을 공공연히 들고 나옴으로써 대남 핵사용을 공식화 했다. 그 이전에는 핵개발의 동기를 북미 적대관계에서 찾아 왔고, 같은 민족인 남측을 겨냥 하지 않았다. 북한은 윤석열 정부의 ‘김정일 정권 소멸론’과 ‘자유의 북진통일론’에 맞서 대남 핵무력 사용을 공언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핵군축’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유엔연설에서 교류·관계정상화·비핵화(END) 구상을 제시하고, 중단→축소→폐기로 이어지는 3단계 북핵해법을 제시했다. 고도화하고 있는 북한 핵개발을 멈추게 하는 것(중단·동결)을 우선적으로 시행하고, 북한이 개발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게 통제하고 축소(핵군축)시키며, 최종적으로 폐기(완전한 비핵화)하는 것이 ‘현실적’ 방안이라는 것이다. 단계별 해법은 실행과정에서의 돌출 변수들과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국과 미국은 정권의 임기가 있고, 정책 성향이 달라 엇박자가 나는 경우가 많았다. 동결 대 보상, 폐쇄→불능화→폐기 등 단계별 비핵화를 위한 여러 차례 합의를 만들고 이행을 추진했지만, 대부분 검증문제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좌절됐다.
단계별 해법이 작동하려면 주고받기의 내용과 수순을 합의해야 한다. 단계별 동시행동원칙이 지켜져야 신뢰를 확보할 수 있다. 6자회담 진행 당시 중국이 내놓은 ‘쌍중단 쌍계병행(雙中斷 雙軌竝行, 핵·미사일실험과 한미군사연습 동시 중단, 평화체제 구축과 비핵화를 동시 병행 추진) 해법’, 싱가포르 6·12 북미공동성명에서 합의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완전한 비핵화의 교환을 시도한 ‘안보-안보 교환 해법’은 지금도 유효하지만 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해법들은 북한 핵개발의 초기 단계에서는 적용 가능성이 높지만, ‘사실상 핵보유국’ 또는 ‘핵보유세력’의 지위를 확보한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 협상에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단계별 해법이 이상적이지만 실효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북핵문제가 불거진 지 30여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올 수 있는 해법은 거의 다 나왔다.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은 해법이 ‘관계 정상화를 앞세우는 것’이다. 관계 정상화를 앞세울 경우 북한 핵보유를 인정한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지만, 수많은 핵을 보유한 소련이 미국과 평화공존을 합의한 이후 붕괴·해체된 경험에서 시사점을 찾아야 한다.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해서는 북한이 핵개발을 중단하고 이미 보유한 핵무기에 대한 통제방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4월로 예정된 미중정상회담 전후에 북미정상회담이 열린다면 한반도 평화공존 프로세스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중 정상이 한국전쟁을 종식하기로 결단하고 2(미중)+2(남북) 또는 4자회담을 통한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 북미 관계 정상화 실현,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 발족 등을 실현한다면 70여년 이상 강고하게 지속하고 있는 정전체제를 해체하게 될 것이다.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구축된다면 우리의 지정학적 리스크도 상당부분 해소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전 통일연구원장 ▷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전 청와대 안보실 정책자문위원장 ▷현 국회 한반도 평화외교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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