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의 남자’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이 장항준 감독의 신작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건넨 말이다. 특유의 유쾌함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쌓아왔지만, 연출작에서는 ‘흥행 대표작’이 없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장항준 감독에게 이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첫 사극 도전작 ‘왕과 사는 남자’는 공개 직후 업계 안팎의 주목을 받으며 설 연휴 극장가 기대작으로 빠르게 떠올랐다.
개봉을 앞둔 현재의 분위기를 묻자, 장 감독은 조심스럽게 “다행”이라는 말부터 꺼냈다. 작품을 준비해 온 시간과 그 과정에서 함께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솔직히 반응이 안 좋으면 걱정이 되죠. 몇 년 동안 준비한 작품인데, 그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저를 믿어준 배우들과 스태프들, 투자해 주신 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들 것 같았거든요. 물론 주변에서는 괜히 들뜨지 말고 조심하라는 이야기도 합니다.”
“이 시대를 떠올리면 보통 계유정난 이야기부터 하잖아요. 살육의 역사고, 드라마틱하고, 이미 너무 많은 작품이 있어요. 좋은 작품도 많고요. 그런 이야기를 굳이 제가 다시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계유정난 이후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부분이 흥미로웠고, 거기에 첨삭하면서 방향을 잡게 됐죠.”
그가 주목한 것은 ‘실현되지 못한 정의’였다. 성공하지 못한 정의는 기억될 가치가 없는가, 실패한 선택은 모두 무의미한가라는 질문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 됐다.
“실현되지 못한 정의의 뒷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실패한 정의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진정한 추모란 무엇인지 묻고 싶었죠. 성공하면 그게 복수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허무하지 않나요. 성공한 불의에 박수를 보내는 게 과연 인간적인 태도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질문의 중심에 놓인 인물이 바로 엄흥도다. 역사 기록 속에서 그는 이름조차 분명히 남아 있지 않은 인물이다. 언제 태어났는지, 어디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고 평생 숨어 살았다는 기록만이 전해질 뿐이다.
“엄흥도라는 사람은 어떤 왕족보다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조선이 추구했던 최고 가치가 거기에 있었을 텐데, 힘에 의해 외면당한 거죠. 그런 사람의 시선으로 단종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싶었어요.”
장 감독은 단종이 왕위에서 밀려난 이유를 ‘나약함’으로 보지 않았다. 정치적 보호막이 사라진 열두 살 소년이 감당할 수 없는 구조 속에 놓였을 뿐이라는 해석이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아버지도 모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출산 중에 돌아가셨어요. 그 어린 왕을 지켜야 할 왕족과 고명대신 중에서 결국 왕족 한 명이 등을 돌렸고, 그 이후로 모두 지지를 거뒀죠. 이 아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기회조차 없었던 거예요.”
장항준 감독은 이 이야기를 하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떠올렸다고 했다.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서사 속에서, 그 한 사람이 ‘구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길 바라는 마음과 닿아 있었다.
“기왕이면 가치 있는 사람이길 바랐어요. 단종이 좋은 성군의 자질을 가진 인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 바람을 영화 속에 담아낸 거죠.”
탄탄한 배우진 역시 영화의 중요한 축이다. 장 감독은 이번 작품의 캐스팅을 두고 ‘인복’보다는 연출자의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인기나 화제성보다 인물이 요구하는 결에 집중했다는 설명이다.
“인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 배우들을 누가 모았습니까. 바로 저예요. 감독 열 명에게 같은 시나리오를 주고 캐스팅하라고 하면 전부 다른 선택을 할 겁니다. 저는 배우를 볼 때 인기보다 연기를 먼저 봤어요. 필요한 나이대 안에서 가장 연기 잘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접근했죠.”
전미도 캐스팅은 그에게도 예상 밖의 선택이었다. 분량이 크지 않은 역할이었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전미도를 떠올렸고 큰 기대 없이 시나리오를 전달했다.
“솔직히 전미도씨가 이 작품에 참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분량이 적어서 안 할 거라고 봤죠. 그런데 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놀랐어요. ‘매화’라는 역할도 미도씨가 연기하면서 분량이 더 늘어난 경우였고요.”
이후 장 감독의 시선은 젊은 배우들에게로 이어졌다. 이미 형성된 이미지보다 지금 이 인물을 가장 설득력 있게 품을 수 있는 얼굴이 누구인가를 먼저 떠올렸다고 했다.
“저는 박지훈을 ‘약한 영웅’으로만 알았어요. 워너원 출신이라는 것도 몰랐고요. 노래하고 춤추는 친구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죠. 가끔 예전 영상을 보면 놀라요.”
유해진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자연스럽게 떠올린 배우였다. 장 감독은 특정 배우를 염두에 두고 쓰기보다는, 인물의 형상이 배우와 겹쳐졌다고 설명했다.
“유해진씨는 20년지기 친구입니다. 일부러 캐스팅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어요. 시나리오를 쓰면서 계속 그 얼굴이 떠올랐죠. 국사책을 찢고 나온 얼굴 같다는 생각도 했고요.”
금성대군 역에 특별출연한 이준혁에 대해서는 분명한 이미지가 있었다. 작품 안에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인물인 만큼, 그에 걸맞은 존재감을 원했다는 설명이다.
“금성대군은 작품 안에서 유일하게 힘을 가진 선인이에요. 정의가 힘을 가질 때 실현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인물이죠. 마지막까지 단종의 곁을 지킨 사람인 만큼, 기개 있고 멋지게 그려지길 바랐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준혁씨를 떠올리게 됐죠. 캐스팅 이후에 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가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그 흐름도 좋게 느껴졌어요. 특별출연이라 분량이 많지 않았기에 가능한 선택이기도 했고요.”
박지훈과의 작업 과정은 특히 밀도가 높았다. 장 감독은 일대일 리딩을 가장 많이 진행한 배우로 박지훈을 꼽았다.
“태도가 정말 좋아요. 일대일 리딩을 가장 많이 했는데, 제안하면 항상 집중해서 듣습니다. 배우가 살아야 영화가 산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미지도 잘 맞았고, 결과적으로 기대 이상이었어요.”
일부에서 제기된 연출적 한계에 대해서도 장항준 감독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극 중 등장하는 호랑이의 CG를 둘러싼 반응에 대해서는 제작 환경을 짚으며 현실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털 있는 동물은 CG 작업 기간이 굉장히 길어요. 한 프레임을 만드는 데만 16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1초에 24프레임을 다 수정해야 하니까 물리적으로 쉽지 않죠. 수정해야 할 CG가 많았지만, 모든 걸 바꿀 시간까지는 충분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저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연기나 시나리오보다 CG 이야기가 나오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해요.”
흥행에 대한 바람도 숨기지 않았다. 다만 그 시선은 개인의 성과를 넘어 한국 영화 전체로 향해 있었다.
“흥행도 중요하지만, 2026년 한국 영화가 다시 살아나는 데 우리 영화가 조금이라도 힘이 됐으면 좋겠어요. ‘왕과 사는 남자’가 바통을 이어받아 잘됐으면 하고, 뒤이어 개봉하는 작품들도 함께 좋은 흐름을 이어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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