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JP 데스크 칼럼] 한국 안의 또 다른 한국,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길

  • 노래로 남긴 고려인의 역사: 고려인마을 한글문학기획전

광주 광산구 월곡동에 들어서면 한국 안의 또 다른 한국을 만난다.
간판에는 러시아어가 먼저 눈에 띄고, 거리에서는 한국어보다 러시아어가 더 익숙하게 들린다.
중앙아시아식 빵집이 줄지어 있고, 젊은 부모와 아이들이 분주히 오간다.
행정구역상 이름은 월곡2동이지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곳을 ‘고려인 마을’이라 불러왔다. 

이곳은 단순한 이주 공동체가 아니다. 한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역사적 기억과 관계의 축적이 응축된 공간이다. 외교와 경제, 문화와 정체성이 교차하는 지점이자, 한국이 스스로를 어떻게 세계와 연결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현장이다. 

그 중심에 있는 곳이 월곡고려인문화관 ‘결’이다. 나무의 결처럼 사람의 삶과 시간이 이어진다는 뜻을 담은 이 공간은, 세계에서 유일한 고려인 역사유물 전시관이다. 이곳에 보존된 기록들은 고려인이 단순한 이주 집단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한 축을 형성해온 주체였음을 증언한다.
월곡고려인문화관 고려인마을 제공
월곡고려인문화관 (고려인마을 제공)

고려인의 역사는 19세기 말 연해주 이주에서 시작해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거점 형성, 그리고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한 강제이주로 이어진다. 약 17만 명이 하루아침에 중앙아시아로 내몰렸지만, 그들은 황무지에서 농사를 짓고 학교를 세우며 공동체를 재건했다. 특히 언어와 기록을 지켜낸 점은 독보적이다. 해외 디아스포라 가운데 한글 문학과 교육 체계를 집단적으로 유지한 사례는 고려인이 거의 유일하다. 

이 역사를 오늘의 언어로 복원하는 작업이 최근 월곡에서 이어지고 있다. 문화관은 고려인들이 남긴 ‘창가집’을 조명하는 기획전을 열었다. 핵심 자료는 국가지정기록물 제13호 제9권인 「리 알렉산드로 창가집」(1945)이다. 1944~45년 중앙아시아 각지를 돌며 채록한 171곡의 노래는, 구전되던 기억이 기록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함께 소개된 ‘전명진 창가집’은 필사 날짜와 시간까지 남아 있어 기록사적 가치가 특히 높다.
 리 알렉산드르와 전명진이 기록한 창가집  사진 제공 고려인마을
리 알렉산드르와 전명진이 기록한 창가집 / 사진 제공: 고려인마을

국가기록원은 이들 자료를 포함해 고려인 소장 기록 23권을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했다. 김병학 고려인문화관 관장은 “창가집은 개인의 노트가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이라며 “강제이주와 유랑 속에서도 고려인들은 노래와 언어로 정체성을 지켜냈다”고 말한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이러한 기록을 다시 조명하는 일은 과거 회고를 넘어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
 
고려인문화관 제공
고려인문화관 제공

오늘날 고려인은 더 이상 역사 속 존재가 아니다. 중앙아시아 전역에는 약 50만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으며, 특히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정치·교육·언론·경제 전반에 걸쳐 중요한 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다언어·다문화 환경에서 축적된 이들의 경험은 한국과 중앙아시아 사회를 잇는 실질적 연결망으로 기능해왔다. 

이 지점에서 고려인의 의미는 문화나 정체성의 영역을 넘어 외교·경제 협력의 토대로 확장된다. 중앙아시아는 에너지와 광물, 농업, 인프라, 제조업, 디지털 산업 등에서 한국과의 협력 잠재력이 큰 지역이다. 제도와 관행, 언어와 문화를 동시에 이해하는 고려인 공동체는 이러한 협력을 현실로 만드는 매개 역할을 해왔다. 그들의 디아스포라 경험은 감정의 유산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신뢰의 사회적 자산이다. 

광주에 정착한 7천여 명의 고려인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이들은 지역 산업과 교육, 돌봄 현장에서 이미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지역사회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주민’이라는 단일한 범주로만 인식될 때, 고려인이 지닌 역사성과 연결성은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다. 

월곡의 작은 전시관에서 시작된 기록과 기억의 복원은 단순한 문화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 맺고, 어떤 서사 위에서 경제 협력과 외교 전략을 구축할 것인가를 묻는 작업이다. 중앙아시아와의 협력이 점차 중요해지는 지금, 고려인은 과거의 디아스포라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연결 자산이다. 

한국의 국가 서사는 언제나 경계와 이동, 교류 속에서 확장돼 왔다. 월곡에서 이어지는 고려인의 이야기는 그 연장선에 있다. 이들의 삶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일은 과거를 기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세계와 연결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설계도다. 
고려인마을 한글문학기획전
고려인마을 한글문학기획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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