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남긴 말이다. 장소, 날씨, 몸 상태 등 하나하나가 모여 '분위기'를 만든다는 의미다. 영화도 마찬가지. 그날의 기분, 나의 경험이 영화의 '평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최씨네 리뷰'는 필자의 경험과 시각을 녹여 관객들에게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일상적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영화 '콘크리트 마켓' 3일 개봉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재난 앞에서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물건이 귀해질수록 가치는 오르고, 생존이 유일한 목표가 되는 순간 도덕은 자연스럽게 가격 뒤로 밀려난다. 거래는 숨겨둔 욕망을 끌어올리고 가격은 말없이 인간의 위계를 나눈다. 이 단순한 경제 공식은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 더욱 선명해진다. 영화 '콘크리트 마켓'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대지진 이후 유일하게 남은 아파트. 그곳에서 현금 대신 통조림이 화폐가 되고, 식량과 연료, 약품 등 무엇이든 사고파는 '황궁마켓'이 열린다. 통조림을 훔치기 위해 황궁마켓에 숨어든 '희로(이재인 분)'는 우연히 그곳에서 오랜 친구와 재회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친구는 상인 회장 '박상용(정만식 분)'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희로는 친구의 죽음에 대한 복수, 그가 지키고자 했던 이를 지키기 위해 황궁마켓에 얼굴을 드러낸다. 그는 시장경제 논리를 무기로 황궁마켓의 판을 조금씩 흔들기 시작하고, 상용의 왼팔이자 수금조인 '태진(홍경 분)'에게 마켓의 새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서로 다른 목적을 품은 두 사람의 거래가 시작되는 순간, 견고해 보이던 황궁마켓의 질서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콘크리트 마켓'이 흥미로운 지점은 재난의 참상을 과시하기보다, 붕괴 이후 새로 작동하기 시작한 시장경제의 논리를 집요하게 응시한다는 데 있다. 재화의 의미가 송두리째 바뀐 세계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 것'으로 다시 호명되는지 그 기준이 어떻게 인간의 서열과 생존 방식을 갈라놓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 '콘크리트 마켓' 3일 개봉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황궁마켓 안에는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온 경제의 언어들이 그대로 들어와 있다. 마켓, 수급, 독점, 가격이 통조림과 인간의 몸, 노동과 두려움 위에 구축되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재난 직후 한 공간에 갇힌 공동체의 공포와 윤리에 가까웠다면 '콘크리트 마켓'은 그 이후 사람들이 스스로 장터를 만들고 룰을 짜는 과정, '폐허 위에 세워진 시장의 논리'를 전면에 내세운다.
영화의 불안정한 분위기는 주인공들이 미성년자라는 설정과 맞물리며 더욱 위태롭고 날카로운 정서를 자아낸다. 어른이 설계한 시장의 룰 안에서 아이들이 몸으로 일구는 시장경제는 한층 더 잔혹하게 비춰진다. 제도도, 보호자도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환경에서 이들은 스스로 가격을 매기고 위험을 계산하며 때로는 어른들보다 더 냉정한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잔혹한 세계관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계산하고 버텨내는 아이들의 얼굴은 설정에 그치지 않고 오래가는 불안과 위태로움으로 완성된다.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를 더욱 구체적으로 빚어낸다. 희로를 연기한 이재인은 한 편의 서사를 담담하게 끌고 가는 중심축으로서 제 몫을 해내고, 홍경은 태진이라는 인물을 설득력 있게 구축하며 위태로운 균형을 촘촘히 메운다. 철민 역의 유수빈은 이 세계를 실제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생활감을 채워 넣으며 특유의 생동감을 빚어낸다. 정만식은 박상용을 통해 이 세계의 위계와 폭력의 구조를 온전히 떠안고 말 그대로 이 세계의 '무게 중심'을 담당한다.
영화 '콘크리트 마켓' 3일 개봉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아쉬운 점도 있다. 영화 중후반 인물들 사이의 정치 싸움과 생존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본격적으로 폭발하는 구간은 이 작품이 가진 잠재적 카타르시스를 가장 세게 터뜨릴 수 있는 지점이나 상황과 캐릭터들의 반전과 동기를 설명하느라 호흡을 늘리고 만다. 단박에 치고 나가야 할 리듬이 묘하게 늘어진다는 인상이다. 인물들이 숨겨온 서사와 반전 역시 너무 친절하게 설명되고 비교적 손쉽게 수습되면서 그동안 영화가 공들여 쌓아온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채 맥이 조금 풀려버리는 인상을 남긴다.
그럼에도 '콘크리트 마켓'은 손에 잡히는 현실감과 거친 에너지로 이 세계만의 톤과 결을 확보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세계관을 흥미롭게 바라봤던 관객이라면 같은 폐허 위에서 전혀 다른 톤으로 펼쳐지는 이 작은 시장의 이야기도 매력적인 변주로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3일 개봉. 러닝타임은 122분 관람등급은 15세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