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윤 칼럼] "베를린의 교훈, 한반도의 비전"

김영윤 사남북물류포럼 대표
[김영윤 (사)남북물류포럼 대표]

  
지난 11월 9일은 동서독을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6년째다. 당시 필자는 독일에서 공부를 끝내고 서독 브레멘에 있는 회사(Koefer Isolier Technik)에 취직해 한국과 연계된 업무를 배우던 중이었다. 베를린 장벽의 개방은 1989년 11월 9일 저녁 19시 경 동독 정부 대변인 귄터 샤보스키(Günter Schabowski)의 기자회견 발언으로 시작된다. 샤보스키는 국경 개방을 허용하는 의미의 새로운 여행 규정’을 동독 주민들에게 통보한다. 새로운 여행 규정의 발효 시점을 묻는 기자 질문에 샤보스키는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즉시 유효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이 발언은 언론을 통해 곧바로 퍼졌고, 시민들은 곧바로 국경을 넘어갈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일시에 수천 명의 동독 주민들이 검문소인 보른홀머 슈트라세(Bornholmer Straße)로 몰려들었다. 국경수비대는 밤 11시 무렵 결국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물밀듯 밀려온 인파로 베를린 장벽 붕괴는 현실화했다.
 
1989년 11월 9일 저녁 8시부터 서독 언론은 베를린 장벽 개방 소식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독일 ARD 방송의 저녁 뉴스 타게샤우(Tagesschau)는 샤보스키의 기자회견 발언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동독이 국경을 개방했다”는 헤드라인을 내보냈다. 시민들이 장벽 위에 올라 환호하는 모습, 자동차 행렬, 동서독 주민이 서로 끌어안는 장면 등이 실시간으로 방송되었다. 다음 날 아침, 모든 신문은 1면에 “장벽 붕괴”를 대서특필했다. 전파를 타고 들어온 베를린 장벽의 붕괴 장면에 필자는 감격했다. 지금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다음날 11월 10일 오전, 필자와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이 시내 중심 “시장 광장(Markt Platz)으로 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운집해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사실을 서로 공유하며 환호했다. 필자 옆에 있던 같은 사무실 사람이 나에게 물어왔다. 분단국에서 온 필자의 심정이 어떠냐고? 필자는 그저 ”당신들이 부럽다“라고 답했다.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것은 동독 주민이다. 동독 정부나 서독 정부는 동독 주민의 강한 통일의 바램에 응한 것 뿐이었다. 구소련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경제 개혁)와 ”그라스노스트“(사회·정치적 개방)가 동독 주민들을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했다. 고르바초프의 민주화와 정치 개혁이 동독 주민의 촛불 집회, 교회 기도 모임 이후 행진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라이프치히의 ‘월요 시위(Montagsdemonstrationen)’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동독 정부를 압박했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이나 다른 국가로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를 요구했다. 공산당 일당 체제 대신, 민주적 선거와 표현·집회·언론의 자유를 요구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약 7만 명이 참여한 시위(1989.10.9)는 매주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평화시위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베를린 장벽을 붕괴했다. 시민들이 장벽 위에 올라가 춤추고 노래하며 축제 분위기를 만들었던 모습이 선하다. 곧바로 망치로 장벽을 부수는 “장벽 쪼개기”가 시작되었다. 동독 주민들이 외쳤던 “우리는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는 장벽이 무너진 후 “우리는 한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로 바뀌었다. 이는 서독 체제로의 통일을 의미하는 강력한 바램이었다.
 
장벽이 무너진 이듬해 필자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1991년 4월 신설 국책연구소인 통일연구원에 들어가 독일통일과 남북한 문제를 연구했다. 그곳에서 정년을 맞은 지도 이제 십수 년이 된다. 벅찬 마음으로 통일 연구를 시작했던 그때와 지금의 남북관계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한 치의 진전도 없는 상태다. 필자는 연구자의 길이 헛된 것이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동독 주민들이 거리로 나와 통일을 요구했던 것은 그들이 서독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의 주민들이 자유롭고 부유하게 사는 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통일전 분단 상태에서도 동서독 주민들은 양쪽 지역을 오갈 수 있었다. 외국인인 필자도 얼마든지 동독을 다녀올 수 있었다. 정권의 바뀜에도 불구하고 동서독 사이의 교류·협력은 중단되지 않았다. 독일통일은 바로 이와 같은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동서독의 연결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로 통일하는 저력을 만들었다. 동독 주민들은 조속한 통일을 원했다. 그들은 “서독의 화폐가 동독으로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으로 가겠다”고 외쳤다. 통일은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40년 이상 서로 이질 체제로 살아왔던 경제를 통합하는 데에는 아쉬움을 남겼다. 동서독 화폐의 1:1 통합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경제적 부작용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1:1 화폐통합은 동독 주민의 심리적 안정과 통합 의지를 고취하는 정치적 배려였으나, 가격 왜곡과 경쟁력 상실, 대량 실업과 산업 붕괴를 초래했다. 서독 자본의 일방적 동독으로의 유입과 함께 막대한 재정적 지원이 필요했다. 서독 자본 중심의 구조조정은 서독 국민의 세금 부담 증가로 연결되었다. 동독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동독 주민의 참여가 배제됨으로써 동독 주민은 경제적 자율성 상실과 소외감을 경험하게 된다. 동독 주민들의 ‘오스탈기(Ostalgie)’는 '동쪽'을 뜻하는 오스트(Ost)와 '향수'를 뜻하는 노스탈기(Nostalgie)의 합성어다. 동독의 문화, 동독식 생활양식을 그리워하는 정서다. 그렇지만 예전의 동독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독일이 당면한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불만과 여전히 존재하는 동서 지역의 격차 등이 그런 정서를 갖게 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정서는 정치적 소외감으로 변해 동독 지역의 극우 정당(AfD) 출현하게 한 것으로도 보인다. 독일 정부는 극우 정당의 출현을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선거를 통해 표출된 동독 주민의 불만을 단순히 극단주의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지적도 있다. ‘오스탈기’는 단순한 과거 회귀가 아니라, 진정한 통합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에 독일통일과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남북한이 과거 동서독처럼 서로 오갈 수 있는 상태라도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분단 시기에도 교류·협력을 이어간 동서독의 경험을 한반도에 적용할 수는 없을까? 통일보다는 통일과 같은 상태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정권 변화에 변함없이 남북한이 교류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북한 스스로 잘 살 수 있는 과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재명 정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한반도의 미래 비전을 만들고는 있는가? 먼저 끊어진 남북철도·도로 연결부터 하자는 제의를 할 용기는 없는지 묻고 싶다.


필진 주요 이력
▷독일 브레멘대학 세계경제연구소 연구원 ▷통일연구원 북한경제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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