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우 단국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베트남공산당 또럼 총비서(서기장)가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북한을 국빈 방문하고 조선로동당 창건 80주년 경축 행사에 참석했다. 올해는 양국 수교 75주년이 돼 ‘친선의 해’로 선포된 해이기도 하다. 이 방문은 2007년 농득마인 총비서의 북한 방문 이후 18년만에 이뤄졌다. 김정은 조선로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이 2019년 제2차 북미정상회담과 베트남 국빈 방문차 하노이를 방문한 이후 6년만이다. 북한은 21발의 예포를 쏘아 환영했고, 김정은 총비서는 또럼 총비서와 함께 의장대를 사열했다. 이어 양국 대표단은 양자 회담을 가졌다. 베트남대표단은 9일 열린 조선로동당 80주년 경축 행사에 참석했고 10일 밤에는 열병식에 참석했다. 리창 중국 총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도 여기에 동석했다. 통룬 시술릿 라오스 국가주석도 조선로동당 창건 8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한편 베트남대표단은 경상유치원을 방문해 호찌민 교실을 둘러보고 어린이들을 격려했다. 그들은 베트남대사관 경내에서 호찌민 흉상 제막식을 가졌다. 이로써 호찌민 동상은 서울과 평양의 베트남대사관에 설치됐다. 또럼 총비서를 비롯한 베트남대표단은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해 김일성과 김정일을 기리며 헌화했고, 김일성의 만경대 고향집을 방문했다. 또럼 총비서의 북한 방문은 베트남과 북한 간 ‘전통적 우호 관계’를 재확인하는 계기였다.

베트남과 북한의 ‘전통적 우호 관계’는 베트남이 북한을 세계에서 세 번째로 공식 승인하면서 시작됐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며, 베트남이 1945년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으로서 독립을 선포했고, 북한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출범했다. 베트남이 독립을 선포한 직후에 이를 공식 승인한 국가는 없었다. 중국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후 1950년 1월 18일에 베트남을 처음으로 승인했다. 이어 소련이 1월 30일에 베트남을 승인했고, 북한이 1월 31일에 베트남을 승인했다. 북한이 1950년 6월 한국전쟁을 일으켜 1953년 7월까지 전쟁 중이었고, 베트남이 1946년 말부터 1954년 5월까지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기에, 양국이 교류할 여력이 많지 않았다. 당시 베트남과 북한의 인사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기원하며 독려했다. 그 가운데 1951년 8월에 호앙꾸옥비엣 베트남 민족통일전선 전국위원회 부주석이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1950년대 양국 관계는 양국이 1955년에 대사관을 개설한 이후 심화됐다. 북한의 서철과 베트남의 호앙반호안이 각각 초대 대사로 부임했다. 이후 양국 지도자의 상호 방문이 이어졌다. 1957년에 호찌민 주석이 북한을 방문했고, 1958년에 김일성 주석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1961년에는 팜반동 베트남 총리가 북한을 방문하여 우호협력협정을 체결했다. 1964년에는 김일성 주석이 베트남을 비공식 방문했다. 이후 베트남전쟁 시기부터 개혁 이전까지 양국의 최고위 지도자들의 상호 방문은 이뤄지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에는 양국 문화예술인들의 상호 교류도 활발했다. 윤대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55년에 백남운 교육상을 단장으로 한 조선인민대표단이 조선예술단과 함께 베트남을 방문했다. 1956년에는 베트남의 노동당(현 공산당) 대표단 및 청년대표단과 북한의 민주여성동맹 대표단이 상호 방문했다. 더불어 양국은 “1956년 문화교류계획서(문화교류협정)”를 교환했다. 1956년 말에 송영 작가를 단장으로 하는 조선문화대표단은 베트남을 방문해 베트남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했다. 송영은 베트남 방문 기록을 <월남일기>로 발간했다.
1960년대에 베트남전쟁이 격화되면서 북한에서는 정부뿐만 아니라 사회단체들이 북베트남을 지지하는 대회를 열곤 했다. 조선-윁남(베트남) 친선협회, 조선 남부윁남(남베트남) 인민투쟁 지지위원회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대학, 중학, 군관학교, 공장, 협동농장 등이 상호 친선관계를 맺었다. 양국은 “1964년 문화교류계획서”에 합의했다. 양국은 이에 기반해 문화예술분야의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고, 북한은 베트남 유학생, 실습생들을 북한으로 초대했다. 베트남인 유학생과 실습생의 전체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고 단편적 정보가 있을 뿐이다. 김상범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68년 초 북한에 파견돼 있던 베트남인 유학생은 약 2500명이었다. 이들은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 및 공장 또는 사업소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김일성 주석이 김일성종합대학 기숙사를 방문해 베트남인 학생들을 격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북한은 베트남전쟁 시기에 북베트남에 물자와 인력을 지원했다. 응우옌티마이호아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66년 10월에 북한군 384명이 베트남에 입국했는데, 그 중 96명이 공군 조종사였으며, 35명이 선전 및 방송 전문가, 즉 심리전 요원이었다. 베트남 파견 북한군은 1968년 말까지 교체 인원도 있어 변동이 있었는데, 그 규모를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 공군 조종사 중 14명이 전투 중 사망하여 박장성 묘지에 묻혔다가, 이후 북한이 이 유해를 고국으로 이송해갔다. 베트남은 전쟁 중 북한의 지원에 대해 매우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또럼이 이를 표시했다.
한편 베트남 역사연구소 팜티홍하 박사가 찾은 자료에 따르면, 1973년 말에 북한은 프랑스 요리법을 배울 실습생 30명을 12개월간 받아달라고 베트남에 요청했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기에 프랑스 요리에 능한 셰프가 있으리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측은 베트남관광공사가 북한인 실습생 10명을 1974년 9월 중순부터 3개월간 실습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 사업이 집행됐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1975년 4월 베트남전쟁이 종전된 이후에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는 형식적 공식관계를 유지하는 정도였다.
베트남의 개혁과 북한의 ‘보수’
탈냉전 시기에 두 나라의 길은 달랐다. 베트남이 1980년대 후반 개혁에 착수했으나, 북한은 사회주의 일인 통치체제를 고수했다. 이 시기에 양국 교류는 활발하지 않았다. 1988년에 보찌꽁 국가평의회 주석(현 국가주석)이 북한을 방문했다. 한편 베트남은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했고, 1992년 12월에 한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베트남은 1980년대 말부터 1998년 동아시아 경제위기 이전까지 경제성장을 지속해나갔다. 정리나 특파원에 따르면, 1990년대 북한이 극심한 기근을 겪을 때 베트남은 1995년부터 2012년까지 거의 4만 톤에 달하는 쌀을 북한에 보냈다.
2000년대에 들어 베트남-북한 간 교류가 전보다 더 활발해졌다. 이는 북한이 베트남의 개혁 성과와 발전모델에 주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1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베트남을 방문했고, 2002년에는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주석이 북한을 방문했다. 2007년 10월 중순에 농득마인 공산당 총비서가 북한을 방문했다. 그 10월 말에는 김영일 북한 총리가 대외무역상, 농업상 등 경제관료들을 대동하고 베트남을 방문했다. 김영일 총리 일행은 기획투자부 등 중앙정부 부처와 하롱베이, 석탄광산, 하이퐁 항구, 호찌민시 산업공단 등을 둘러봤다. 이로 보아 김영일 총리의 베트남 방문 목적은 베트남의 개혁 상황을 직접 관찰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2000년대에 들어 김정일 총비서는 베트남 개혁의 경험을 참고하여 북한에서 개혁에 착수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던 듯하다. 하나 2011년 12월에 김정일이 사망함에 따라 베트남 개혁의 경험을 북한에서 실천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김정일 사후 김정은이 국내적으로 권력 기반을 다지느라, 2010년대에 양국 관계는 확대되지 못했다. 2012년에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베트남을 방문했을 뿐이다.
2010년대 말에 북한은 대외적 고립을 탈피하려고 시도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었다. 북한과 미국은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제1차 북미정상회담을 가진 후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제2차 회담을 열었다. 김정은 총비서는 2019년 2월 26일 하노이에 도착하여 28일에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김정은은 내심으로 협상 타결을 기대했던 듯하나,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때 사람들은 북미회담 결렬로 인한 패닉에 빠져 김정은의 베트남 국빈 방문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바로 이어 3월 1~2일 간 가진 김정은의 베트남 국빈 방문은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됐다. 수행원들은 하이퐁, 하롱베이 등 베트남 개혁의 현장을 둘러봤다. 당초 김정은도 베트남 개혁의 현장을 방문할 것이라고 예상됐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이 국빈 방문에서 베트남 지도자들은 ‘사회주의 형제’로서 김정은을 위로하려고 그를 성심성의껏 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양측은 관광부문을 활성화하기로 합의했다.
김정은-트럼프 회담이 결렬되며, 북한의 남한 및 서방권과의 관계는 얼어붙었다. 이어진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은 북한의 고립에 한 몫을 더 했다. 베트남 정부가 북한 주재 베트남 대사를 발령했으면서도 신임 대사가 부임하지 못하고, 평양에 주재하던 대사가 임기를 연장했다. 베트남 주재 북한 대사 자리는 오랫동안 공석이었다.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후 양국 관계는 이렇게 정지된 상태였다.
양국 관계의 새 장이 열릴까?
이번 또럼 총비서의 북한 방문은 베트남, 북한 양국의 전통적 우호 관계를 공고히 다졌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두 지도자는 당, 국가 및 각 부문, 각급의 교류를 확대하는 데 동의했다. 또럼 총비서는 당 건설과 국가발전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한 회의를 조직할 것을 제안하면서, 경제개혁 및 대외경제의 경험, 그리고 경제관리정책, 수출입 및 경제사회발전에 관한 정보를 북한과 나눌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문화, 스포츠, 관광, 교육, 보건, 정보통신 등 여러 부문에서도 협력을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양국은 다섯 가지 협력 문건에 서명했다. 그것은 외교 협력 협정, 국방 협력 의정서, 통신사 협력 협정, 보건의료 및 의학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 베트남 상공회의소와 북한 상업국 간 협력 양해각서이다. 양국이 서명한 협정들은 상호협력의 선언에 불과하지만, 세부사항을 논의해 실질적 협력을 도모해 갈 것이다. 김정은 총비서가 베트남의 개혁을 벤치마킹하여 북한의 개혁에 원용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북한이 유엔의 제재를 받지 않는 분야에서 시작해 협력을 확대해간다면, 베트남이 북한의 개혁에 기여할 부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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