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학노 동국대 명예교수(국제통상학)]
합의문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되었다던 한·미 통상협상이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다. 미·일 간의 양해각서(MOU) 내용이 공개되면서 이제는 대미 투자를 하지 말고 차라리 관세를 더 무는 게 좋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한·미 간의 협상 내막을 잘 모르는 국민으로서는 언론보도만 보면 답답할 수밖에 없다.
우리 정부는 미국이 미·일 간 합의와 동등한 조건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데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더 나아가 미측에 달러 조달을 위한 통화 스와프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이 우리에게 3500억 달러의 현금 투자를 요구한 것은 무리이며, 투자 방식 또한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에 합의했지만 미국 측 요구대로 전액 현금 방식으로 펀딩할 경우 2025년 8월 현재 우리 외환보유액 4163억 달러의 80%를 상회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외환위기가 우려된다는 점을 제기한다. 일본의 5500억 달러 대미 투자 규모는 일본의 외환보유액 1조3000억 달러의 40% 수준으로 여유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은 기축통화국에 포함되어 있고 미·일 간 무제한 통화 스와프 협정이 체결되어 있어서 외환 조달의 여지가 있지만 우리의 처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의 요구가 무리하기 때문에 차라리 관세율 인상을 받아들이자는 뒷북 주장도 나온다. 어느 미국 학자의 주장을 언론은 공유하기도 한다. 거액의 투자를 하느니 10% 관세를 더 내는 게 낫고 트럼프 행정부가 이제 3년 6개월 남았는데 트럼프가 물러나면 미국의 관세 폭탄 정책은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오고 한국이 버티면 미국이 양보해서 한국의 대미 투자 조건을 완화해 주지 않겠느냐는 기대도 하는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두 가지 점에서 낙관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첫째, 트럼프의 관세폭탄 정책 자체가 터무니없는 힘의 논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지지하는 미국인들이 적지 않고 미국 자동차 업계는 일본의 투자 조건으로 일본산 자동차 관세율을 15%까지 인하해 준 데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 보호무역 정책을 지지하는 미국인들의 정서는 미국의 정치경제적인 위상 하락에 따른 보상심리에서 나온 것으로 트럼프는 이를 조장, 이용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따라서 트럼프가 임기를 마친 후에도 미국의 보호무역 요구는 자연 소멸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둘째, 미국은 일본과의 MOU 템플릿을 한국에 적용하고 있는데 일본은 그대로 놔둔 채 한국에 대해서만 협상 조건을 유리하게 변경해 주기 어렵다.
미국의 과도한 요구에 대해 국내적으로 분위기가 안 좋아지고 있고 조지아주 비자 문제는 여론을 악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화가 난다고 판을 깰 수는 없다. 2024년 미국은 3조3000억 달러를 수입한 세계 최대 수입국으로 2위인 중국보다 7000억 달러 더 많다.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는 1조2000억 달러로 세계 모든 수출국이 대미 흑자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결코 작지 않은 10% 관세를 더 물고 오래 버티면 다행이지만 시장점유율이 감소하고 유통망이 붕괴되면 몇 년 후에 완전 복원을 기대하기 어렵다. 수출 다변화, 폼목 다변화 말은 쉽지만 시간이 많이 걸린다. 중국으로 돌아가는 다리는 이미 끊겼다. 중국은 우리 상품의 수출시장은커녕 우리 안방을 놓고도 싸우는 경쟁자로 바뀌었다. 미국에 이어 멕시코까지 관세 인상에 나서고 있다. 판을 깨는 것은 하책이다.
이미 합의한 투자 규모의 조정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므로 3500억 달러를 조달하고 운용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미국과 가능한 방안을 협의해야 한다. 정부의 외환보유고를 운용하고, 수출입은행 등이 정부 보증으로 해외에서 차입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통화 스와프(Swap)를 활용하는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 정부가 통화 스와프를 요구한 것은 협상 전략상 잘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가 기축통화국이 아니고 외환보유액도 많지 않기 때문에 우리 요구대로 미국이 무제한 스와프를 허용해 줄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기존에 한국이 600억 달러 규모의 통화 스와프를 미국과 체결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1000억~1500억 달러 규모 정도로 타협할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또한 투자방식에 대해서 원만히 타협할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의 주장처럼 투자 방식이 미국 일방적인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고 운영하면서 변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미 통상의 불확실성이 길어져서는 곤란하다. 우리 기업들은 불경기의 한복판에서 가뜩이나 사기가 떨어져 있다. 한·미 통상은 미국의 규제를 푸는 대외적 규제의 돌파 과정이다. 협상이 마무리된 후 정부는 대내적 규제를 풀어야 한다. 역대 정부 출범마다 그랬듯이 이재명 정부도 규제 개혁을 외치고 있다. 강한 입법부의 드라이브 속에서 자고 나면 새로운 법률과 규제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법률을 없애야 하는 규제 개혁을 믿을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이라도 기업규제혁신센터를 대한상공회의소에 설치해서 기업들이 불평하는 규제를 모조리 책상 위에 모아 놓고 하나하나 존폐를 결정한다면 그나마 믿을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학노 필진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 경제학 박사 △통상교섭민간자문위원회 위원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