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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스페셜-독립투사 권기옥④ 끝]해방 직전 임시정부 조선비행대를 기획하다

이상국 아주닷컴 대표입력 : 2018-05-23 17:30수정 : 2018-05-24 09:16
한국 공군의 '어머니'로...그의 뜨거운 비행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운남육군항공학교에서 권기옥이 첫 단독비행에 성공한 직후 찍은 기념사진. 출처 국가보훈처]



# 라이트 형제의 꿈과 권기옥의 꿈

1903년 12월17일 동네 앞의 벌판에서 12마력의 엔진을 달고 두 개의 프로펠러를 돌리면서 비행기 한 대가 날아올랐다. 이 장면을 구경하는 이는 5명 뿐이었다. 비행기는 3m쯤의 높이로 솟아올랐고 100m를 날아가 아슬아슬하게 내려앉았다.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비행기를 탔던 첫 비행사는 동생 오빌 라이트(1871-1948)였고 지상에서 신호를 보냈던 사람은 형 윌버 라이트(1867-1912)였다.
 

[독립투사 비행사 권기옥]



우린 이 역사적인 순간을 어린 시절부터 만나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지만, 23년 뒤 중국 우남의 하늘을 날아오른 우리 겨레 여성비행사를 제대로 만나지는 못했다. 물론 인류사를 바꾼 비행의 첫 경험과, 식민지의 여성으로 독립을 위해 비행사가 된 경우를 동일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하늘을 날아오르는 비장함과 떨림은 어찌 다를 바가 있겠는가.

특히 무기와 전력(戰力) 전반의 열세로 고심하던 임시정부 진영에서는, 창공으로 날아올라 압도적인 위치에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전투기는 그 자체가 승리의 표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도 아닌 중국의 공군부대에서 비행실력을 쌓은 조선인 여성이 있었고, 1935년 상해에서 동남아를 경유해 일본까지 날아가는 '선전비행'을 한다는 소식은, 당시 독립진영에서는 경천동지할 뉴스였을 것이다. 역사는 가정(假定)이 없지만, 이 비행이 성공했더라면, 독립투쟁사를 다시 썼을지도 모른다. 권기옥은 그런 점에서 시대를 앞서 식민지의 질곡을 바꾸려했던 선각자적 독립투사임에 틀림없다.
 

[독립투사 비행사 권기옥]



# 남편 이상정과 함께 임정 활동

2년뒤인 1937년 마침내 중일전쟁이 일어난다. 국민정부는 피난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권기옥은 조선민족혁명당(1935년 7월 남경에서 창당한 조직이다) 소속 요원을 중심으로 한 90여명의 무리와 함께 남경을 떠났다. 이듬해 3월 중경에 도착했다. 권기옥은 중경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된다. 운남육군항공학교와 풍옥상부대에서 배운 영어와 일어, 일본인에 관한 각종 정보들을 중국 군인들에게 교육했다.

당시 중국의 국민정부 교관 일을 수행하면서 은밀히 조선민족혁명당의 독립투쟁을 돕고 있었던 정황이 보인다. 그는 임국영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고, 모종의 임무 수행을 위해 곤명으로 갔다는 기사가 조선민족혁명당 기관지('망원경')에 실렸다. 남편 이상정은 1938년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광복군 창설을 주도했고 중국 관련 외교를 담당했다. 1939년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옮겨온 뒤 그는 외무부 외교연구위원과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됐다. 당시 중국은 광복군이 중국군의 휘하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는데, 이것을 바로 잡은 사람이 이상정이었다. 조선과 중국이 평등한 관계가 유지돼야 제대로 양국의 연대가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을 한 것이다. 권기옥 부부는, 임시정부의 '요인(要人)'이 되어 있었다.

# 애국부인회의 사교부장

그가 다시 뉴스로 떠오르는 것은 1943년이다. 그해 중경 임시정부는 한국애국부인회라는 직할조직을 재구성한다. 이때 권기옥은 조직의 네트워크와 운영을 담당하는 사교부장이었다. 조선 여성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 전열에 참여토록 하는 일과, 여성들을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일을 했다. 해방을 2년 앞두고 있었던 시기였지만, 그들에겐 여전히 끝도 없고 희망도 없는 투쟁환경 속이었고 오직 '독립' 두 글자를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길 뿐이었다. 그해 2월 출범한 애국부인회의 선언문을 잠깐 들여다 보자.

"지금 우리 민족해방운동은 공전의 혁명 고조를 타고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30여 동맹국이 모두 우리 우군이 되어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임시정부 소재지에 있는 (중경의) 혁명 여성들은 당파나 사상을 묻지 않고 일치단결하여 애국부인회를 재건함으로써 국내와 세계 만방에 산재한 일천 5백만 애국여성의 총단결의 제1성을, 그리고 3천만 대중이 쇠와 같이 뭉쳐서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대한독립과 민족해방 완성의 제1보를 삼으려 한다."

# 광복군 비행대 편성계획을 이끌어낸 '조선비행대 프로젝트'

조선여성을 각성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던 사교부장 권기옥은, 그해(1943년) 여름에 그로서는 가슴이 몹시 뛰었을 어떤 다른 일을 기획하고 있었다. 중국 공군 비행사로 활약하던 사람들을 규합하는 일이었다. 그가 생각한 것은 비행경험을 지닌 이들이 뭉쳐서 조선비행대를 편성하는 것이었다.

중일전쟁 이후 멈춘 그의 '비행의 날개'는 내면 속에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처음엔 어쩌면 허황된 꿈처럼 보였을 수도 있는 그 계획은, 1945년 3월 임시정부 군무부의 '광복군 건군 및 작전계획' 속에 포함된다.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건군 계획에는 '광복군 비행대 편성'이 당당히 실려 있었다. 

# 해방 직전까지도 치열한 투쟁은 계속됐다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을 맞기 다섯 달 전에, 꿈틀거리고 있던 조선비행대의 꿈. 조선총독부를 향해 돌격하는 창공의 날개를 자임하려 했던 권기옥의 꿈은, 8.15 해방과 함께 새로운 의미로 되솟아오른다. 이쯤에서 우리는, 불굴의 독립의지를 다시 새긴다. 타력(他力)에 의한 해방의 저류에는, 바로 그날까지도 치열하고 집요하게 진행된 투쟁의 불꽃이 있었다는 사실. 권기옥의 비행 의지야 말로, 이 나라 독립투쟁사의 견고한 상징이 아닐 수 없다.

해방 이후, 권기옥은 뜻밖에 남편을 잃는다. 1947년 모친상을 당한 이상정은 중경에서 먼저 귀국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 때문이었을까. 뇌일혈로 쓰러져 세상을 떴다. 권기옥은 해방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실부(失夫)의 충격을 겪는다. 비통을 추스르며 1949년 그토록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왔다.

# 대한민국 공군을 출범시킨 '어머니' 

그는 해방 직전까지 놓지 않았던 비행부대의 꿈을 해방 공간에서 실현하기 시작한다. 최용덕, 이영무와 함께 공군 창설에 힘을 쏟은 것이다. 최용덕 장군을 공군의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권기옥은 공군을 출범시킨 '어머니'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바빠졌다. 국회 국방위 전문위원을 맡아 최전선을 돌아다니며 전쟁통에 일어난 참혹한 사건들을 조사했다. 공비토벌작전이 있었던 지리산,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거제도를 누볐다. 

권기옥은 재산을 장학사업에 기부하고 장충동의 낡은 건물에서 여생을 보내다 1988년 4월19일에 눈을 감는다. 타계 11년 전인 1977년에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된 바 있다.

중학교의 한 영어교과서에는 'I Want To Fly'라는 제목의 스토리가 등장한다. 독립투사 첫 여성비행사 권기옥의 어린 시절과 날개의 꿈에 관한 이야기다. 한 사람의 꿈이 어떻게 고난과 격동의 역사를 비행해 왔는지, 그 꿈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지금 우리는 제대로 알아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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