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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윤이상 탄생 100주년, 우리의 미래 100년을 모색하다

강승훈 기자입력 : 2017-09-12 18:00수정 : 2017-09-12 18:00
김영배 성북구청장

[김영배 성북구청장]

올해는 윤이상 선생(1917~1995)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선생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조지 거슈윈, 벨라 바르토크와 함께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작곡가로 꼽히지만 유독 한국에서 위상이 달라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다행히 최근 윤 선생을 추모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성북구도 그중 하나다. 9월 17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윤 선생이 살았던 성북동 집터에 표석을 설치하고 우리옛돌박물관에서 기념음악회도 준비했다. 부인 이수자 여사 등 유족 초청도 검토 중이다.

성북구와 선생의 인연은 1953년부터 1956년까지 단 3년이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성북동 128-13번지 한옥에서 살았다. 이 시기의 윤이상 선생은 예술가로서, 인간으로서 절정기를 보냈다.

성북동은 조지훈, 이태준, 박태원, 염상섭, 김광섭, 김용준, 김환기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인들이 창작활동을 펼친 곳이다. 윤이상 선생의 집에서 길 하나를 두고 살던 시인 조지훈과의 교류는 유명하다. 자연스레 박두진, 박목월의 청록파는 물론 여타 문화예술인과의 교류도 이어졌을 것이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모든 것이 궁핍했으나 그 어느 때보다 선생의 창작열은 높았고 가정도 단란했다. 대표작 '현악 4중주 1번', '피아노 3중주'를 완성했고, 아들도 태어난 것이다. 유학은 자신의 예술적 성장을 한국음악의 성장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생은 보란 듯이 그것을 해냈다.

하지만 선생은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으로 귀국하게 됐다. 독일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납치돼 강제송환 당한 것이다. 사상적 자유를 추구하는 예술가에게 독재의 시대가 어떤 고난을 안겼을 것인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수 있다. 해외 저명인사의 적극적인 구명활동으로 2년간의 투옥생활을 마쳤지만, 선생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 해외를 떠돌아 다녀야 했다.

선생이 부재한 고국에서의 상황도 순탄치 않았다. 고향 경남 통영에서 열리던 윤이상국제음악제는 '통영국제음악제'로, 윤이상음악당은 '통영국제음악당'으로, 윤이상 콘서트홀은 '콘서트 메인홀'로, 윤이상 기념공원은 '도천테마공원'으로 개명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윤이상평화재단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지원예산이 전액 삭감되기도 했다. 생가 역시 주변 도로 확장공사로 소실될 위기에 처했다.

윤이상 선생의 삶은 권력이 사상을 시비로 한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유린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예술가뿐만 아니라 시민의 권리를 함축한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윤이상 선생이 세계적인 작곡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지점이기도 하다.

자료와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윤 선생의 집은 109㎡ 규모로 마당과 우물이 있는 작은 한옥이었다. 그러나 1993년쯤 소실돼 현재 선생의 집터는 인도가 됐다. 오랜 시간 '윤이상기념관' 건립 등 추모사업에 대한 요구가 있었고 행정적 준비를 하고 있음에도 뜻을 이루지 못한 이유 중 하나다.

성북구는 윤이상 선생 탄생 100주년인 올해를 추모사업을 본격화하는 전환점으로 삼았다. 선생을 통해 수많은 문화예술인에게 영감을 주고 명작을 탄생시킨 성북동이 더 널려 알려질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독재권력으로부터 어렵게 쟁취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돌아보고, 경계하는 촛불로서 윤이상 선생의 삶이다. 그의 삶에서 배워야 대한민국의 미래 100년이 건강할 수 있다. 시민의 삶과 가장 밀착된 지방정부 성북구는 더디지만 우직하게 실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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