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CI의 중국 대중문화 읽기➂] 주선율 장르의 진화…중국 드라마 ‘인민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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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철 기자
입력 2017-06-0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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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후난위성텔레비전 홈페이지]

촛불은 횃불보다 뜨거웠다. 정부에 대한 불신과 사회 불의에 대한 공분은 국민을 광장으로 모이게 했다. 그 뜨거운 가슴을 한 데 모이게 한 것도, 새로운 정부의 서막을 연 것도 우리들의 주인의식 바로 ‘국민의 이름’이었다.

중국에서도 ‘인민의 이름’으로 정의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열망이 들끓고 있다. 촛불을 손에 들고 광장으로 모이지는 않았지만, 대신 텔레비전과 인터넷 화면 앞으로 모여들었다. 최근 방영돼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중국 드라마 ‘인민의 이름으로(人民的名義)’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인민의 이름으로’는 반부패(反腐敗) 수사극이다. 국가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고발하고 그들을 법의 심판대 위에 세워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중국 드라마 제작풍토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국가와 당의 치부를 드러내고 민감한 정치적 소재를 다뤄야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영웅무회(英雄無悔)’, ‘절대권력(絶對權力)’, ‘대설무흔(大雪無痕)’과 같은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사상안전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드라마 심의 기준이 엄격해지면서 부조리극 드라마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그러던 중 2013년 미국 정계의 생태와 권력에 대한 야심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가 중국 인터넷 플랫폼에서 방영돼 큰 인기를 끌었다. 중국에서 드라마 토론장으로 유명한 ‘티에바(貼吧)’에는 이 드라마를 보며 가려운 곳을 대신 긁어주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는 글들이 꽤 많이 올라왔었다.

이후 2014년 드라마 ‘메콩강 사건(湄公河大案)’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실제 2011년 10월 5일 메콩강 중국인 선원 납치 살해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이 드라마는 중국, 태국, 미얀마 정부의 묵인 하에 골든트라이앵글에서 자행돼 온 마약밀매 사건을 조사하는 반부패 수사를 줄거리로 하고 있다.

최근 10년 간 거의 제작된 적 없었던 반부패 수사극은 이를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길 바라는 중국인의 바람은 다시 ‘인민의 이름으로’ 브라운관에 돌아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드라마가 당이 기획과 제작을 직접 진두지휘했다는 점이다.

중국에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당의 역사를 서술하는 ‘주선율(主旋律)’이라고 불리는 영화·드라마 장르가 있다.

주선율이란 애국주의·전체주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문화경향을 뜻하는 단어로,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주선율은 사회주의 혁명, 항일전쟁, 국공내전 등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주류 이데올로기를 인민에게 알리고, 이를 통해 인민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쓰였다.

지금도 주선율은 자본주의적 가치가 범람하는 현대 중국에서 사회주의 국가라는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판에 박힌 내용과 선혈이 낭자한 전투장면 때문에 시청률이 저조해지기 시작하자 주선율은 변화를 거듭해왔다. 자본력과 탄탄한 구성, 오락적 재미까지 겸비한 주선율 드라마는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수많은 히트작을 탄생시켰다.

‘인민의 이름으로’는 정부, 자본, 문화시장이 의기투합한 초대형 프로젝트이며 그 중심에는 부패척결과 공산당 이미지 쇄신이라는 중국 정부의 의지가 반영돼 있다.

정부와 기업, 기업과 은행으로 이뤄지는 부정청탁과 뇌물수수 그리고 이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고위 관료들의 이해관계와 도덕적 해이는 더 이상 중국 공산당이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爲人民服務)’는 믿음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2016년을 떠들썩하게 한 고위 관료 웨이펑위안(魏鵬遠)의 부정축재 사건은 그의 전 재산을 압류하고 뇌물수수 혐의로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자전거로 출퇴근 하던 소박한 관리의 숨겨진 호화저택에서 2억 위안대의 현금이 발견됐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현금을 세기 위해 16대의 계수기가 동원되었지만 너무나 많은 현금을 세느라 그 가운데 4대가 과열로 불이 붙었다.

시진핑(習近平) 정부가 부정부패 척결의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이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 드러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세간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여론을 의식한 중국 공산당은 당과 당원들에 대한 이미지 제고와 부패척결 의지를 강화하고자 드라마 제작을 직접 기획했다. 최고인민검찰원(最高人民檢察院)과 선전부(宣傳部)에서 유명 드라마 작가이자 장쑤성작가협회부주석을 역임하고 있는 저우메이썬(周梅森)을 찾아가 반부패에 관한 극본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표현과 내용에 대한 적극성과 과감함을 허용하는 조건도 덧붙였다. 뇌물수수 혐의로 구금된 관료들에 대한 심층 인터뷰와 자료 조사도 관련 기관의 협조 하에 순조롭게 진행됐다. 본래 민감한 주제인 정치와 현안에 대한 드라마는 심사가 매우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놀랍게도 단 10일 만에 모든 심사를 통과했다. 5개의 민간 기업이 막대한 양의 제작비를 지원하고 연기파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최고의 인기채널 후난위성텔레비전은 삼고초려 끝에 이 드라마의 판권을 구입했고 황금시간대 방영을 결정했다. 1999년 위성방송국시대가 열린 이래 최고 시청률 7%를 기록했다는 ‘인민의 이름으로’는 이렇게 탄생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부패척결과 정의 사회구현은 정권의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드라마를 통한 위안이 아니다. 앞으로 현실에서 정의사회가 구현되는 것을 목도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국민의 이름으로, 그리고 인민의 이름으로.

[고윤실 아시아문화콘텐츠연구소(ACCI) 책임연구원]


고윤실 아시아문화콘텐츠연구소(ACCI) 책임연구원(상하이대학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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