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 <53>장칭리 – 티베트사태 강경진압한 공청단파 핵심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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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9-2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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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공산당 중앙이야 말로 우리 인민들의 살아있는 진정한 보살이다.”

2007년3월 당시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 서기였던 장칭리(張慶黎)는 한 네티즌이 자신에게 “장서기가 우리들에게 새로운 집을 지어줬으니 장서기는 살아있는 보살이다”고 칭찬하자 이렇게 답했다. 이 발언은 인민일보, 신화사 등을 통해 중국 전역에 보도됐다. 동시에 서방매체들의 제목으로도 자주 뽑혀 국제적인 유명세를 탔다.

이 발언은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환영을 받았지만 티베트의 소수민족인 짱(臟)족 주민들에게는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8년 3월 시짱자치구 라싸(拉薩)에서 티베트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다.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있었던 중국은 시짱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진압에 나선다. 장칭리는 시짱자치구 서기로서 계엄령을 집행하고 강경진압을 주도했다.

티베트유혈사태가 마무리된 후 2008년 5월 자치구내 화상회의에서 장칭리는 “지난 3월의 폭동은 달라이 라마 집단이 사전에 모의,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주도한 것”이라며 “달라이 라마는 그동안 유혈 시위를 배후 조종하면서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 개최를 저지하려 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이어 그는 “달라이 라마는 승복을 입은 늑대며, 인면수심의 악마”라며 “우리는 달라이라마와 함께 피와 불이 튀기는 투쟁을 해야 한다”고 맹비난했다. 장칭리의 강경대응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분리분자를 효과적으로 제압해 중국의 핵심이익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민족모순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그는 일관되게 티베트 분리독립 세력에게 강경책을 구사한다. 그는 지난 3월 티베트 유혈시위 3주년을 맞아 가진 인터뷰에서 “분리행위를 철저히 방지하고, 발생한다면 강력한 타격을 줘야 한다”고 경고했다. 장칭리는 이어 “티베트의 안정은 중국 전역의 안정에 직결된다“며 ””달라이 라마 집단의 행위를 폭로, 비판하고 대중에게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지난 2009년 친정부 성향의 티베트족 학자들을 동원해 펴낸 ‘시짱경제사회발전보고서’를 인용해 “중국이 티베트를 병합했던 1959년 142위안에 불과했던 1인당 GDP가 2009년에는 1만3861위안으로 100배 가까이 늘었다”고 강조했다.

장 서기는 이어 ‘한족(漢族)은 소수민족과 떨어질 수 없고, 소수민족은 한족과 떨어질 수 없으며, 그러기에 각 민족이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점과 ‘단결과 안정은 행복이고 분리와 동란은 재앙’이라는 두가지 주제로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6년동안 시짱자치구 서기로 근무했던 장칭리는 지난달 허베이(河北)성 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허베이는 베이징과 톈진에 접해있는 지리적 이점을 등에 업고 가파른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곳이다. 2008년 시짱사태에서 보여준 강경진압은 서방언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공산당 중앙으로부터는 높은 평가를 받았음을 반증한다. 



장칭리는 1951년 1월 산둥(山東)성 둥핑(東平)현의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1971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둥핑비료공장에 들어가 생산직 근로자가 됐다. 1973년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이후 라인책임자까지 올라간다. 1976년 그는 둥핑현 부서기가 됐으며 성실하고 의욕적인 태도가 널리 알려져 1979년 공청단 중앙으로 불러올려진다. 그는 공청단 중앙에서 1986년까지 7년여를 근무한다. 그는 한잉(韓英), 왕자오궈(王兆國), 후진타오(胡錦濤), 쑹더푸(宋德福) 등 4명의 공청단 중앙서기처 1서기를 경험한다. 이 시절의 경험으로 인해 그는 공청단파 핵심인사로 분류된다.

1986년3월 그는 산둥성으로 돌아가 둥잉(東營)시 부시장 겸 시정부 비서장으로 올라섰다. 2년후에 부시장에 올랐다. 5년이 지난 1993년3월에 둥잉시 시장에 올랐다. 1995년초 산둥성 타이안(泰安)시에는 관료들의 경제비리사건이 터져나오자 산둥성 정부는 장칭리를 구원투수격으로 타이안시 서기로 보임시킨다. 3년후인 1997년 장칭리는 산둥성 선전부 상무부부장에 올랐으며 이듬해 간쑤(甘肅)성 선전부장으로 이동한다. 1998년 간쑤성 란저우(蘭州)시 서기를 잠깐 맡았다가 1999년 10월에 그는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생산건설병단의 상무부서기(장관급)에 오른다. 2002년4월 중국신건(新建, 신장건설)집단공사 총경리로 자리를 옮겼다가 2004년 12월 신장위구르 자치구 부서기로 승진한다. 그리고 2005년 11월 양촨탕(楊傳堂) 시짱서기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장칭리가 그를 대신해 시짱자치구 서기로 자리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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