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습도, 살을 태우는 햇빛, 그리고 잠깐 하늘이 무너진 듯 쏟아지는 소나기. 한여름의 풍경은 더 이상 익숙했던 온대 기후의 모습이 아니다. 문제는 이 변화가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닥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난은 언제나 불평등하게 찾아온다. 농민과 건설노동자, 배달기사, 그리고 홀로 사는 노인들에게 폭염은 불편한 날씨가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재난이 됐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 6월 1일부터 7월 27일까지 전국 평균 열대야 일수는 7.8일로, 전국 단위 관측이 시작된 1973년 이후 같은 기간 가장 많았다. 평균기온도 24.2도로 역대 두 번째로 높았다. 북태평양고기압 위로 티베트고기압이 겹치면서 뜨겁고 습한 공기가 한반도에 갇혔고, 8월 1~7일 전국의 낮 최고기온은 33~39도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됐다. 경남 양산에서는 밤사이 기온이 29.1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까지 국내 온열질환자는 1399명, 추정 사망자는 8명으로 집계됐다. 환자의 80% 이상이 야외에서 쓰러졌으며 작업장에서 발생한 사례가 가장 많았다. 사무직 노동자에게 폭염은 고통스러운 출퇴근길일 수 있지만 야외 노동자와 고령층에게는 목숨이 걸린 문제가 되는 셈이다.
'인간 냉장고'의 등장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최고기온이 40도를 넘는 날을 '고쿠쇼비(酷暑日)', 직역하면 '잔혹하게 더운 날'이라고 부른다. 기후변화는 새로운 날씨뿐 아니라 새로운 단어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지난 21일 기후현 구조와 다지미, 아이치현 도요타의 기온이 40도를 넘어섰고 이후 닷새 연속 40도 이상이 관측됐다. 7월 13~19일에는 약 1만 1000명이 온열질환으로 응급 이송됐으며 14명은 병원 도착 당시 이미 숨진 상태였다.
일본 산업 현장에는 성인 한 명이 들어가 몸을 식히는 냉각 부스 ‘도히에몬 박스’까지 등장했다. 내부 온도를 약 15도로 유지하고 머리와 목, 어깨, 등에 5도 안팎의 찬 공기를 보내는 이른바 ‘인간 냉장고’다. 고등학교 야구 경기는 가장 더운 시간을 피해 오전과 저녁으로 나뉘었고, 농민들은 고온에 강한 벼와 아보카도 같은 아열대 작물을 시험하고 있다. 온난화 시대의 생존 매뉴얼이다.
유럽에서는 폭염이 지나간 뒤에도 재난이 이어진다. 프랑스에서는 6월 17일부터 7월 2일까지 이어진 폭염 기간 잠정적으로 5764명의 초과 사망자가 발생했다. 고온은 토양과 강, 호수, 식물의 수분을 빠르게 빼앗았다. 땅이 마르면 태양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수분 증발이 아니라 지표와 대기를 데우는 데 쓰인다. 더위가 가뭄을 만들고 가뭄이 다시 더위를 증폭시키는 악순환이다.
유럽의 곡물 생산량은 올해 약 900만 톤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고, 라인강과 루아르강, 다뉴브강의 수위 저하는 물류와 수력발전까지 위협하고 있다. 세계기상귀속 연구진은 극단적인 증발 조건이 기후변화로 서유럽에서는 약 80배, 동유럽에서는 약 40배 더 발생하기 쉬워졌다고 분석했다.
학자들은 이번 폭염을 단순한 이상기후나 자연현상으로 보지 않는다. 자연적인 대기 흐름이 직접적인 원인일 수는 있지만, 그 배경에는 인간이 만든 기후변화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기후과학자인 제임스 렌윅(James Renwick) 뉴질랜드 웰링턴 빅토리아대 교수는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극심한 폭염은 기후변화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에도 폭염은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지구 평균기온이 조금만 올라가도 폭염은 훨씬 자주 나타나고, 더 오래 지속되며, 강도도 훨씬 세진다는 것이다. 평균기온이 1~1.5도 상승하는 것만으로도 극단적인 고온이 발생할 가능성은 그 이상으로 커질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미국 일리노이대(UIUC)의 아시시 샤르마(Ashish Sharma) 교수는 이를 "숫자가 바뀐 주사위"에 비유했다.
예전에도 주사위를 던지면 운이 나쁘면 6이 나왔듯이 폭염은 원래도 존재했다. 하지만 기후변화는 주사위 자체를 바꿔 놓았다. 이제는 같은 주사위를 던져도 극단적인 더위가 나올 확률이 훨씬 높아졌다는 뜻이다.
고기압이나 블로킹(blocking) 같은 대기 현상이 폭염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계기라면, 지구온난화는 그 폭염의 강도와 지속시간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
샹핑 시에(Shang-Ping Xie)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캠퍼스 교수는 이번 폭염도 블로킹 현상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
강한 고기압이 한 지역에 오래 머물면 공기가 계속 아래로 내려오면서 압축돼 뜨거워진다. 동시에 구름과 비가 줄어 강한 햇볕이 지표면을 계속 달군다. 비가 오지 않아 메마른 땅은 열을 식히지 못하고 오히려 더 많은 열을 대기로 내보낸다. 여기에 평년보다 따뜻해진 서해와 동해가 추가적인 열과 수증기를 공급하면서 밤에도 기온이 떨어지지 않는 열대야가 이어진다.
시에 교수는 "이 모든 현상의 바탕에는 온실가스가 만들어낸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 온난화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과학은 신중하다. 이번 폭염이 기후변화 때문에 정확히 몇 배 더 자주, 혹은 더 강하게 발생했는지를 말하려면 '기후 귀속(attribution)' 연구가 필요하다. 실제 지구와 인간이 온실가스를 거의 배출하지 않았을 가상의 지구를 컴퓨터 모델로 비교해 인간 활동이 특정 폭염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계산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귀속 연구가 끝나지 않았다고 해서 인간 활동과 폭염의 연결고리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과학계의 공통된 견해다.
미국 워싱턴대의 대기과학자 다건 프리어슨(Dargan Frierson) 교수는 "지구는 이미 화석연료 배출로 크게 달라졌다"며 "이제 산업화 이전의 기후와 완전히 무관한 기상현상을 찾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화석연료가 만들어낸 막대한 열에너지가 대기와 바다에 축적되면서 폭염은 더 자주, 더 오래, 더 극단적으로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자연적인 기후 변동도 영향을 미친다. 미국 일리노이대의 프란시나 도밍게스(Francina Dominguez) 교수는 강한 엘니뇨와 지구온난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 세계 대기 순환을 바꿀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엘니뇨는 폭염이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를 바꾸는 요인이라면, 온실가스는 그 폭염이 발생하는 기준선 자체를 계속 높이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결국 같은 고기압이 찾아와도 지금의 여름은 과거보다 더 뜨겁다.
전문가들은 온실가스 배출이 계속되는 한 폭염은 앞으로 더 자주 찾아오고, 더 강해지며, 더 오래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프리어슨 교수는 "화석연료를 더 많이 태울수록 더 극단적인 폭염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렌윅 교수는 2003년 7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유럽 폭염과 비슷한 규모의 재난이 2050년에는 약 2년에 한 번꼴로 반복될 수 있다는 영국 기상청 분석을 소개하며 "온실가스 배출이 늘어날수록 변화도, 피해도 함께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시에 교수도 "기후모델은 수십 년 전부터 지금과 같은 미래를 경고해 왔다"며 "전 세계에서 반복되는 폭염과 대형 산불은 그 예측이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폭염은 더 이상 예외적인 기상이변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기후변화의 새로운 기준선(new normal)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폭염의 시기와 장소는 자연적인 대기 흐름이 결정할 수 있지만, 그 강도와 빈도는 온실가스가 축적될수록 더욱 커질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결국 지금의 폭염은 일시적인 이상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반복될 미래의 예고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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