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탐사기획] 협회 간판 믿었는데… 보증금 100억 삼킨 '자본금 1000만원'의 덫

  • 국토부 소관 법정단체 건물서 발생한 전세사기… 전대차 구조 사각지대

  • 1심 승소했지만 보증금 회수 난항… 청년·외국인 세입자들만 '벼랑 끝'

[편집자주]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합니다. 아주경제 탐사보도팀 '발품'은 20~30대 기자들이 현장으로 들어가 사람을 만나고 목소리를 기록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경제·산업·정치·사회·부동산·문화를 가리지 않고, 삶과 맞닿은 모든 현장을 추적합니다. 문제는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고 끝까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발품'은 보이지 않던 것을 드러내고,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끝까지 전하기 위해 한 번 더 확인하고 집요하게 묻겠습니다. 독자가 미처 닿지 못한 곳까지 대신 걸어가겠습니다.
전대차 전세사기가 일어난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건설기술인협회 별관 전경사진박승호 기자
전대차 전세사기가 일어난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건설기술인협회 별관 전경[사진=박승호 기자]

"국가 관련 업무를 하는 협회가 하니까 뭐 괜찮겠지,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어요."

피해자 A씨가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오피스텔과 전세 계약을 맺은 건 그런 믿음 때문이었다. 해당 건물의 소유주는 국토교통부 소관 법정단체인 한국건설기술인협회. 건물 지하에선 협회 직원들이 세미나를 열었고, 건물 관리인은 하자가 생길 때마다 직접 찾아와 문제를 해결해 줬다. 그렇게 아무런 문제 없이 계약을 연장하며 5년을 살았다.

그런데 2023년 9월, 별안간 내용증명이 날아들었다. 임대업체가 건물주에게 내야 할 임대료를 수개월째 연체해 계약을 해지하니 퇴거하라는 내용이었다. 일주일 내로 나가지 않으면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경고도 덧붙여졌다. 추석 연휴 직전이라 변호사에게 연락할 수도 없었다. 대부분 2030 직장인이었던 세입자들은 순식간에 패닉에 빠졌다. 며칠 뒤에는 법원 집행관들이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와 살림살이를 뒤지기 시작했다. 악몽은 그렇게 시작됐다.

세입자들은 확정일자를 받았고 전입신고도 마쳤다. 공인중개사 역시 안전한 매물이라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전세보증금은 돌아오지 않았다. 피해 세대만 28가구, 피해 금액은 100억원에 달했다. 그리고 이 거액을 삼킨 건 다름 아닌 자본금 1000만원짜리 회사였다.

회사 이름은 소버린스테이트(이하 소버린)로 임대·관리를 주업으로 하는 업체였다. 소버린은 협회로부터 건물 별관을 통째로 임차한 뒤, 개별 세입자들과 다시 전세 계약을 맺는 '전대차(재임대)' 구조로 운영됐다. 세입자들이 실제로 계약을 맺은 상대는 건물주인 협회가 아닌 소버린이었고 전세보증금 역시 소버린의 법인 계좌로 들어갔다.

이 구조 하에서는 소버린이 협회에 임대료를 밀려 계약이 해지되더라도 세입자들이 원소유주인 협회에 보증금 반환을 요구할 법적 근거가 없다. 심지어 협회와 소버린 사이 계약서에는 '계약 내용을 제3자에게 발설할 수 없다'는 비밀유지 조항까지 있었다고 한다. 세입자들은 이러한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파악할 기회조차 차단당했다.
 
소버린스테이트와 세입자가 체결한 부동산 전세계약서에 기재 있던 특약사항사진 제공건설기술인회관 별관 피해 입주민 모임
소버린스테이트와 세입자가 체결한 부동산 전세계약서에 기재 있던 특약사항[사진 제공=건설기술인회관 별관 피해 입주민 모임]

공적 기록 역시 소버린의 지위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협회는 소버린에 전세권설정등기를 마쳐 줬고 등기부등본에는 소버린이 정식 전세권자로 공시돼 있었다. 전세계약서의 특약사항도 신뢰를 더했다. 계약서 특약 제3조에는 '본 계약은 소유주 한국건설기술인협회가 동의 및 승인한 전세권자 ㈜소버린스테이트와의 임대차 계약임'이라는 문구가 명시됐다. 협회가 직접 보증하는 계약이라는 인상을 주는 대목이다.

반면 바로 아래 제4조에는 '임대인과 임차인의 의견 조율이나 협의사항이 있을 경우, 한국건설기술인협회에는 책임을 묻지 아니한다'는 내용도 동시에 적혀 있었다. 협회 명의로 신뢰를 형성하면서도 분쟁 발생 시 협회의 법적 책임은 배제하는 구조였다.

피해자 중에는 과거 전세보증금을 떼인 경험 탓에 공신력 있는 협회 소유 건물을 선택한 이도 있었다. 민사 소송에 참여한 25세대 중 외국 국적자가 3명 포함된 점도 눈에 띈다. 이들에게 전대차 구조는 해외에서 익숙한 임대관리 대행 방식과 유사하게 보여 의심을 품기 어렵고, 전세 계약의 법적 구조에도 익숙하지 않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협회는 2014년 소버린과 임대차 계약을 체결했고, 건물이 완공된 2016년부터 2023년까지 월 8000만원에서 시작해 최대 9500만원까지 인상된 임대료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소버린이 협회에 제출한 전대차계약서에는 실제 100억원이었던 보증금 총액이 대폭 축소시켜 기재돼 있었다.

협회와 소버린 사이 계약서에는 '세입자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전세보증금 총액이 소버린이 협회에 낸 보증금의 80%를 초과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다. 임차보증금이 20억원이었으니 소버린이 받을 수 있는 전세보증금 상한은 16억원에 불과했다. 다만, 80%를 초과할 경우 소버린이 세입자에게 보증보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단서도 달려 있었다. 이후 합의문에서는 이 단서가 '보증금 초과분을 협회에 추가보증금으로 납입'하는 조건으로 수정됐다. 그러나 소버린은 100억원에 달하는 전세보증금을 수취하면서도 협회에 추가보증금을 납입하지 않았다. 협회 역시 7년간 임대료를 받아오는 동안 합의문 이행 여부는 물론 실제 전세보증금 규모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2023년 9월 한국건설기술인협회가 입주자들에게 발송한 임대차계약 해지 내용증명 중 일부사진 제공건설기술인회관 별관 피해 입주민 모임
2023년 9월, 한국건설기술인협회가 입주자들에게 발송한 임대차계약 해지 내용증명 중 일부[사진 제공=건설기술인회관 별관 피해 입주민 모임]

2023년 9월 임대료가 5개월간 연체되자, 협회는 소버린과 세입자들에게 임대차계약 해지를 통보하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내용증명에는 '소버린이 사실과 다른 계약서를 제시해 동의를 받았으므로 해당 동의는 무효이며, 입주자들과의 계약은 동의 없는 무단 전대'라는 주장이 담겼다. 협회는 같은 해 10월 소버린 대표 최모씨를 사문서위조 및 위조사문서행사, 업무방해, 전세사기 혐의로 형사고소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입장은 달랐다. 협회가 계약을 유지하면서 '비밀유지 조항'으로 임대차 계약 내용을 제3자에게 알리지 못하게 했고, 그 사이 소버린이 협회 동의를 앞세워 세입자를 모았다는 이유에서다. 피해자들은 협회 역시 이 구조를 방치한 책임이 있다며 민사소송을 제기했으나, 1심 법원은 협회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은 협회가 실제 전차보증금 규모나 합의문 이행 여부를 확인할 권리는 있었으나 의무는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국토교통부 소관 법정단체의 건물이라는 공신력 아래 세입자들이 모였고 이를 발판 삼아 자본금 1000만원 규모의 임대업체는 약 7년간 100억원의 보증금을 챙겼다. 법원은 1심에서 소버린 측에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으나, 변제 능력이 없어 사실상 보증금 회수는 기약이 없는 실정이다. 피해자들의 일상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지만, 법정단체 건물의 공신력을 내세워 100억원을 끌어모을 수 있었던 기만적인 전대차 구조는 여전히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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