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건의 심리렌즈] 최준희 스타벅스 사진, 기자들은 왜 일상까지 논란으로 가공할까?

  • 일상을 논란으로 바꾸고, 반응을 후속 기사로 삼는 연예 기사 문법의 심리

사진최준희 소셜미디어
[사진=최준희 소셜미디어]

한 장의 커피 사진이 있었다. 미국 신혼여행 중 찍은 일상 사진이었다. 그런데 그 사진은 곧 '인증샷'이 됐고, '논란 속 마이웨이'가 됐고, 과거 발언까지 다시 끌려 나오는 소재가 됐다. 커피는 더이상 커피가 아니었다. 입장이, 태도가, 정치적 신호가 됐다.

배우 故 최진실의 딸 최준희의 이야기다. 최근 미국 신혼여행 중 스타벅스 음료를 든 사진을 공개했다가 구설에 휘말렸다. 시점이 문제였다. 앞서 스타벅스코리아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에 부적절한 문구를 사용한 프로모션으로 비판을 받았고, 행사 중단과 사과에 나섰다.

최준희는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스타벅스를 지지하기 위해 올린 사진이 아니라는 항변이었다. 그는 "미국 여행인데 남이사 커피를 사 먹든 안 먹든 왜 그렇게 선동 기사로 이어지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공감할 만한 반응이다. 최준희의 말처럼 기자들은 왜 한 사람의 커피 사진을 이렇게 빨리 '입장'으로 번역할까. 그리고 왜 그 번역 작업에 이토록 능숙해졌을까.

연예 기사에는 이상한 의식이 있다. 논란을 만들어낸다. 입장을 기다린다. 입장이 없으면 '입장 無'라고 쓴다. 사과하지 않으면 '사과 없었다'고 쓴다. 사과하면 '결국 고개 숙였다'고 쓴다. 해명하면 '해명에도 싸늘'이라고 쓴다. 이쯤 되면 사실 확인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한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도록 몰아붙이는 일이다.

기자들이 모두 못돼서 그런 걸까. 꼭 그렇지는 않다. 기자 개인의 악의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람을 소재로 바꾸는 일에 익숙해지는 환경이다. 클릭이 보상이 되고, 논란이 성과가 되고, 사과가 후속 기사로 이어지는 환경에서 기자는 조금씩 배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면 기사가 느려지고, 사람을 소재로 보면 기사가 빨라진다는 사실을.

최준희의 스타벅스 사진도 그랬다. 최근의 사회적 쟁점은 스타벅스코리아의 5·18 관련 프로모션이었다. 이와 관련한 비판은 가능하다. 역사적 상처를 건드린 기업 마케팅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공적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미국 신혼여행 중 올린 개인의 커피 사진은 성격이 다르다. 스타벅스코리아의 부적절한 마케팅과 개인의 미국 여행 사진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기사의 문법은 그 거리를 빠르게 지운다. 같은 브랜드라는 이유로, 같은 시기라는 이유로, 그리고 한 사람이 유명인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런 보도를 전하는 기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첫 번째 심리는 사건화 강박이다. 기자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이 아니다. 직업적으로는, 아니 거의 반사적으로 사건성을 찾는 사람이다. 누가 무엇을 했는가. 그 행동은 지금의 사회적 쟁점과 연결되는가. 갈등은 있는가. 비판은 붙을 수 있는가. 유명인은 얽혀 있는가. 이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돈다.

두 번째는 도덕적 우월감 및 도덕적 중개자 착각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행동에서 사회적 규범 위반의 냄새를 맡으면 빠르게 심판자의 자리로 올라간다. 기자 역시 그렇다. '논란이 됐다', '비판이 이어졌다', '싸늘한 반응' 등의 표현은 객관적인 전달처럼 보이지만, 심판대의 장치를 한다. 기자는 직접 욕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욕할 수 있는 무대를 깔아준다.

세 번째는 포착의 유능감이다. 남들이 지나친 사진 한 장에서 의미를 찾아냈다는 생각. 별것 아닌 일상에서 사건성을 발견했다는 생각. 그건 기자에게 작은 성취다. 그래서 '재조명', '포착', '화제', '논란'이라는 단어는 위험하다. 처음에는 정보를 정리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반복되면 사소한 장면을 사건으로 키우는 수단이 된다.

네 번째는 반응 유도를 통한 자기효능감이다. 기사가 나가고 댓글이 붙고, 당사자가 반응하면 기자는 자신이 무언가를 움직였다고 느낀다. 당사자가 침묵하면 침묵을 기사로 쓰고, 반박하면 반박을 기사로 쓴다. 사과하면 사과를 기사로 쓴다. 여기서 사과는 종결이 아니라 후속 콘텐츠다. 논란의 끝이 아니라 논란의 다음 회차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 인간 행동(Nature Human Behaviour)에 따르면 부정적인 단어가 들어간 헤드라인은 클릭률을 높이기 쉽다. 2003년 연구는 약 10만 5000개의 헤드라인 변형, 570만 클릭, 3억 7000만건 이상의 노출 데이터를 분석해 평균 길이의 헤드라인에서 부정적 단어가 하나 늘어날 때 클릭률이 2.3% 증가하는 경향을 확인했다.

기자는 이 사실을 논문으로 배우지 않아도 몸으로 안다. '해명'보다 '논란', '근황'보다 '시끌', '사진 공개'보다 '인증샷 논란'이 더 잘 눌린다는 것을 안다. 포털의 숫자가 알려준다. 댓글이 알려준다. 데스크의 반응이 알려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자는 자극적인 제목을 쓰는 게 아니라, 자극적인 제목을 쓰지 않는 일을 손해로 느끼기 시작한다. '클릭' 보상에 의한 학습을 하는 셈이다.

분노를 유발하는 기사가 잘 읽히면, 기자는 분노를 조직하는 법을 익힌다. 직접 화내지 않아도 된다. '네티즌은 분노했다'고 쓰면 된다. 직접 단죄하지 않아도 된다.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고 쓰면 된다. 직접 사과를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 '입장은 아직 없다'고 쓰면 된다. 이 얼마나 편리한 방식인가. 기자는 심판자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심판이 열릴 경기장을 친절하게 마련한다.

가장 위험한 단계는 비인격화다. 연예인과 유명인의 가족은 어느 순간 사람이 아니라 '소재'가 된다. 신혼여행 중인 사람, 피곤한 사람, 실수할 수 있는 사람, 감정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논란의 당사자'가 된다. 그러면 기자는 가혹한 문장을 써도 가혹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팩트만 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팩트는 배열되는 순간 칼이 될 수 있다. 무엇을 앞에 놓고, 무엇을 뒤에 붙이고, 어떤 단어를 제목에 올리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일상은 입장문이 되고, 사소한 행동은 인격의 증거가 된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는 '도덕적 이탈' 개념을 통해 사람들이 해로운 행동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비윤리적으로 느끼지 않는 과정을 설명했다. 책임을 분산하거나, 피해를 축소하거나, 상대를 비인격화하면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덜 불편하게 느낀다. 언론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만든 논란이 아니라 대중 반응을 전했을 뿐"이라는 말은 책임을 흩뜨린다. "이미 SNS에 올린 사진 아닌가"라는 말은 피해를 축소한다. "공인이라 감수해야지"라는 말은 상대를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기사 소재로 만든다.

대중도 이 구조의 바깥에 있지는 않다. 양질의 기사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극적인 제목을 누른다. 사생활 침해를 비판하면서도 누군가의 사생활 기사에 오래 머문다. 마녀사냥을 싫어한다고 말하면서도 다음 먹잇감이 나타나면 빠르게 구경꾼이 된다. 기자만 타락한 것이 아니다. 대중도 기사 시장의 공동 제작자다. 기자는 대중의 욕망을 핑계 삼고, 대중은 기자의 제목을 핑계 삼는다.

그래서 최준희의 스타벅스 인증샷 논란은 일부 기자들의 문제가 아니다. 기사 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표본이다. 기업의 잘못이 개인의 소비 사진으로 번지고, 개인의 사진이 정치적 태도로 번역되고, 그 번역이 다시 기사로 굳어진다.

이런 생태계가 바뀌려면 거창한 윤리 선언보단 작은 제동이 필요하다. 기사화할 수 있는 것과 기사화해야 하는 것은 다르다는 기준, 대중이 궁금해한다고 해서 모두 공익은 아니라는 판단. 최소한의 브레이크는 있어야 한다.

어느덧 케케묵은 관념처럼 자리한 '언론의 자유'는 마음껏 찌를 자유가 아니다. 찌를 수 있을 때도 왜 찔러야 하는지 스스로 묻는 능력이다. 기자에게 착한 마음은 필요없다. 멈출 줄 아는 감각이 필요할 뿐이다.

그게 없다면 기자는 계속 타인의 사과를 기다릴 것이다. 사과가 나오면 사과를 쓰고, 사과가 없으면 침묵을 쓰고, 반박하면 반박을 쓸 것이다. 무서운 기사는 악의로 쓰인 기사가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쓰이고도, 한 사람을 무너뜨리는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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