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 저널(WSJ)이 최근 보도한 ‘AI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현상은 AI 시대 노동과 경영, 인간 존재의 개념 자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전환의 신호탄이라 할 만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AI는 문서를 요약하거나 회의록을 작성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일부 글로벌 기업 임원들은 자신의 이메일과 연설문, 인터뷰, 강연, 팟캐스트, 경영 철학을 AI에 학습시켜 자신과 거의 유사한 디지털 분신을 만들고 있다. 이 AI 디지털 트윈은 단순 챗봇이 아니다. 조직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리더십 코칭을 하며, 성과 평가를 지원하고, 심지어 국제 콘퍼런스에서 연설까지 대신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리드 호프먼이다. 링크드인 공동 창업자인 그는 자신의 22년간 저술과 인터뷰, 강연 자료를 학습시킨 ‘리드 AI’를 운영 중이다. 이 디지털 트윈은 2024년 이후 75회가 넘는 강연과 발표를 수행했다. 두바이 국제 콘퍼런스에서는 프랑스어·중국어·힌디어 등 74개 언어로 자기소개를 하며 청중과 실시간 질의응답까지 진행했다.
이는 산업혁명 이후 노동 개념의 최대 변화 중 하나일 수 있다. 증기기관이 인간의 근육을 확장했다면, AI 디지털 트윈은 인간의 정신과 판단을 확장한다. 개인용 컴퓨터(PC)가 문서 작업과 계산 업무를 혁신했다면, 디지털 트윈은 인간의 사고와 의사결정 자체를 복제하는 단계로 진입하는 셈이다.
미국 산업용 포장재 기업 그리이프의 최고인사책임자(CRO) 발라 사티야나라야난은 자신의 AI 트윈 ‘발라봇(BalaBot)’을 통해 이미 3300명이 넘는 직원들과 상호작용했다고 한다. 직원들은 저성과자 관리나 경력 개발 같은 민감한 문제를 AI에게 상담받는다. 어떤 직원은 AI가 추천한 코칭 전략 덕분에 조직 내 리더로 성장했다고 평가받았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변화다. 과거 기업의 핵심 자산은 공장과 자본이었다. 이후에는 데이터와 플랫폼이 핵심 자산이 됐다. 이제는 조직 내부의 경험과 노하우, 즉 인간 자체가 디지털 자산으로 변환되고 있다. 결국 AI 시대 기업 경쟁력은 ‘누가 더 뛰어난 인간 지식 자산을 AI화했는가’의 문제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복잡한 윤리적·철학적 질문이 따라온다. 디지털 트윈은 누구의 것인가. 직원이 회사를 떠나면 그 AI 분신도 함께 떠나는가. 아니면 회사가 계속 소유하는가. 더 나아가 기업이 인간 직원을 해고하고 AI 분신만 남겨 활용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실제로 미국 기업들 내부에서는 이미 거센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직원들은 “내 이메일과 사고방식이 모두 AI에 들어가는 것이 불편하다”고 반발한다. 또 AI가 잘못된 고용 규정을 전달하거나 왜곡된 의사결정을 내릴 경우 법적 책임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AI의 대표적 약점인 ‘환각(Hallucination)’ 현상 역시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리드 AI는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질문에 실제 리드 호프먼과 다른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결국 AI 디지털 트윈은 인간을 완전히 대체하기보다는 인간의 확장 도구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AI는 인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을 재배치한다. 반복 업무와 일상 응대는 AI가 맡고, 인간은 보다 창조적이고 전략적인 영역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특히 AI 디지털 트윈은 고령화 사회의 중요한 해법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처럼 급속한 저출산·고령화가 진행되는 나라에서는 숙련된 베테랑 인력의 경험이 퇴직과 함께 사라지는 문제가 심각하다. 그러나 AI 트윈은 수십 년의 현장 경험을 디지털 자산으로 보존할 수 있다. 제조업 장인의 기술, 기자의 취재 노하우, 의사의 진료 경험, 교사의 교육 철학 등이 디지털 형태로 후배 세대에게 이어질 수 있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특히 언론과 방송 분야에서도 디지털 트윈의 활용 가능성은 매우 크다. 베테랑 기자의 문체와 논리 구조, 인터뷰 방식, 취재 철학을 AI가 학습한다면 후배 기자 교육과 기사 품질 향상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경제 전문 앵커의 화법과 분석 스타일, 국제문제 해설위원의 논리 체계까지 AI가 재현할 수 있게 된다면 미디어 산업 역시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한국 기업들의 적용 가능성과 미래 방향
한국 기업들도 이미 AI 디지털 트윈 시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AI 반도체와 온디바이스 AI 기술을 통해 개인 맞춤형 AI 비서를 고도화하고 있으며, SK 하이닉스는 AI 서버와 HBM 메모리를 기반으로 차세대 AI 인프라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또 네이버와 카카오 같은 플랫폼 기업들은 한국어 특화 초거대 AI를 기반으로 기업형 AI 에이전트 시장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 앞으로는 단순한 AI 챗봇 수준을 넘어 기업 CEO와 임원, 영업 전문가, 금융 분석가, 언론인, 법률가 등의 전문성을 학습한 AI 디지털 트윈 서비스가 본격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제조업에서는 숙련 기술자의 노하우를 AI가 학습해 생산라인 문제를 실시간 진단할 수 있다. 금융권에서는 베테랑 PB(프라이빗 뱅커)의 상담 패턴을 AI가 학습해 고객 맞춤형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병원에서는 명의(名醫)의 진단 경험을 AI 트윈으로 축적해 의료 서비스 격차를 줄일 수도 있다. 언론 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국제정세 전문가의 분석 스타일을 학습한 AI는 미중 패권전쟁, 중동 지정학, AI 산업혁명 같은 거대한 흐름을 실시간으로 분석하며 독자들에게 더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결국 미래 경쟁력은 단순한 기사 생산량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통찰과 경험을 얼마나 AI화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게 된다.
다만 한국 기업들은 반드시 세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 첫째, 인간 중심 원칙이다. AI는 인간을 대체하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 역량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사용돼야 한다. 둘째, 데이터 주권 원칙이다. 직원 개인의 지식과 경험에 대한 소유권과 보상 체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셋째, 윤리와 책임 원칙이다. AI의 판단 오류에 대한 최종 책임은 반드시 인간이 져야 한다.
디지털 트윈은 결국 대세가 될 것이다. AI는 이제 단순한 검색 도구나 업무 자동화를 넘어 인간의 ‘또 다른 자아’를 만드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에이전틱 AI(Agentic AI)가 결합되면 변화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AI가 스스로 판단하고 계획하며 행동하는 시대가 오면, 인간은 반복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될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 인간은 더 전략적인 사고와 창조적 활동, 그리고 인간다운 삶에 시간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육체적 피로는 줄어들고, 정신적 스트레스 역시 완화될 수 있다. AI 디지털 트윈은 단순한 생산성 혁신을 넘어 인간에게 ‘쉼’과 ‘사유’의 시간을 되돌려주는 문명 전환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다. 인간이 AI를 통해 어떤 문명을 만들 것인가의 문제다. 진정한 AI 시대의 승자는 가장 빠른 기계를 가진 나라가 아니라, 인간과 기술의 조화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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