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자의 장한나 이야기 | 진리·정의·자유] 장한나 사장, 만년 적자의 예술의전당을 넷플릭스와 유튜브에 버금가는 문화 플랫폼으로

서울 서초동 우면산 기슭의 예술의전당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다. 그것은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거울이며, 한 시대의 정신을 담아내는 상징이다. 오페라하우스 지붕 위에 얹힌 갓의 형상처럼, 예술의전당은 한국적 전통과 세계적 예술이 만나는 장소다. 그러나 상징만으로 기관은 살아남지 못한다. 아름다운 건축은 유지비를 대신 내주지 못하고, 명성만으로 적자를 메워주지도 않는다. 문화는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고, 사람의 발걸음을 끌어와야 하며, 시대의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장한나(Sarah Chang·사라 장)의 예술의전당 사장 취임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문화행정의 방향 전환이며, 예술의전당이라는 공간이 앞으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묻는 시대적 질문이다. 그의 취임사에서 가장 강렬한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예술의전당의 경쟁자는 일본의 예술의전당도 아니고, 미국의 링컨센터도 아니며, 중국의 국가대극원도 아니다. 우리의 진짜 경쟁자는 넷플릭스와 유튜브다.”
 
이 한 문장은 한국 문화행정의 오래된 벽을 단숨에 무너뜨린다. 과거의 예술의전당은 ‘시설’이었다. 좋은 공연장, 좋은 음향, 좋은 전시 공간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공간이 아니라 플랫폼의 시대다. 사람들은 반드시 공연장에 가지 않는다.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네플릭스를 보고, 우투브에서 세계 최고의 공연을 소비한다. 시간은 파편화되었고, 감상은 개인화되었으며, 문화는 이미 구독경제 속으로 들어갔다.
 
예술의전당의 만성 적자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관객은 줄고, 비용은 늘었다. 공공기관이라는 이름 아래 혁신은 느렸고, 과거의 방식은 미래를 설득하지 못했다. 누적 결손금 수백억 원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경고다. 문화기관도 이제는 생존 전략을 가져야 한다는 선언이다.
 
장한나는 바로 그 지점을 읽었다. 경쟁 상대를 해외 공연장이 아니라 디지털 플랫폼으로 규정한 것은, 예술의전당을 ‘건물’이 아니라 ‘콘텐츠 기업’으로 보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매우 현대적이며, MZ세대와 AI 시대를 정확히 관통하는 시선이다.
 
오늘의 젊은 세대는 권위보다 경험을 선택한다. 형식보다 참여를 원하고, 설명보다 직관을 좋아한다. 긴 해설보다 짧은 클립을 소비하고, 공연장보다 공유 가능한 순간을 기억한다. 알고리즘은 취향을 학습하고, 플랫폼은 관객을 기다리지 않는다. 먼저 찾아간다. 예술의전당 역시 “좋은 공연이 있으니 와라”가 아니라 “당신의 삶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겠다”는 전략으로 바뀌어야 한다.
 
장한나는 그 가능성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단순한 유명 연주자가 아니다. 세계 음악사의 혹독한 기준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천재로 불렸지만, 천재라는 말은 언제나 잔인하다. 사람들은 결과만 본다. 그러나 그 결과 뒤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훈련과 고독이 있다.

장한나는 네 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여섯 살에 줄리아드 예비과정에 들어갔고, 여덟 살에 New York Philharmonic과 Philadelphia Orchestra의 협연 무대에 올랐다. 당시 주빈 메타와 리카르도 무티 앞에서의 오디션은 전설처럼 회자된다. 두 거장은 어린 소녀의 연주를 듣고 즉시 무대를 허락했다. 여덟 살의 데뷔가 곧 세계 클래식계의 공식 입장이 된 것이다.
 
첫 번째 천재성의 증거는 바로 이 ‘여덟 살의 데뷔’다. 클래식 음악은 조기교육의 세계이지만,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가 어린 연주자에게 즉시 협연을 허락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것은 단순한 신동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음악가라는 판정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첫 음반이다. 그는 열 살 무렵 첫 앨범 《Debut》를 녹음했고, EMI Classics를 통해 발매된 이 음반은 빌보드 클래식 베스트셀러 차트에 빠르게 올랐다. 어린 연주자의 데뷔 음반이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인정받는 일은 흔치 않다. 이는 ‘귀여운 천재 소녀’가 아니라 시장과 평단이 동시에 인정한 진짜 연주자였음을 뜻한다.
 
세 번째는 세계 거장들의 평가다. Yehudi Menuhin은 그를 두고 “내가 들은 가장 완벽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평가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그의 브람스와 브루흐 협주곡 음반은 《Gramophone》이 선정한 역사상 최고의 녹음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었다. 이는 유행이 아니라 시간이 검증한 예술이라는 뜻이다.
 
이 세 가지는 말해준다. 장한나의 성공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였고, 천재성은 단지 시작일 뿐이며, 결국 그것을 완성한 것은 혹독한 자기 훈련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루 열 시간 이상 연습했고 또 연습했다. 손끝의 감각 하나를 위해 수천 번 활을 움직였다. 무대 위 10분의 완벽을 위해 무대 아래 수만 시간이 필요했다.
 
영화 《Tár》 속 한 장면이 있다. 젊은 학생이 “나는 바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유는 음악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그는 바흐가 백인 남성이며, 자신은 비백인 팬젠더이기에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장한나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조차 단지 뛰어난 음악가라서가 아니라 여성이고 아시아계라는 상징 때문이라는 뉘앙스를 남긴다.
 
이 장면은 오늘의 문화정치를 상징한다. 예술은 실력보다 정체성으로 소비되기도 한다. 그러나 장한나의 진짜 위대함은 거기에 있지 않다. 그는 여성이라서, 아시아인이라서 위대한 것이 아니다. 오직 압도적인 실력으로 세계를 침묵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정체성은 출발점일 수 있으나, 예술의 최종 심판은 언제나 실력이다. 무대는 결코 정치적 올바름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음 하나가 틀리면 모든 수사가 무너진다. 장한나는 그 냉혹한 진실을 통과한 사람이다.
 
그의 음악적 성취는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의지의 기록이다. Berlin Philharmonic, Vienna Philharmonic, Chicago Symphony Orchestra, Boston Symphony Orchestra와의 협연은 국적을 봐주지 않는다. 오직 실력만 남는다. 세계 최고의 지휘자들과 함께 무대에 선다는 것은 매번 심판대 위에 오른다는 뜻이다.
 
그는 언제나 살아남았다.
그 배경에는 가족이 있었다.
장한나의 가족은 한 사람의 천재를 위해 사실상 온 삶을 걸었다. 아버지는 한국의 명문 중앙고 출신으로, 윤용로 전 기업은행장과 동기동창으로 알려져 있다. 안정된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딸의 재능을 위해 미국행을 선택했다. KOTRA 미국지사 근무 등 삶의 방향 자체가 결국 ‘장한나 프로젝트’로 움직였다.
 
아버지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교사였고, 어머니 역시 작곡가였다. 실제로 장한나의 첫 번째 스승은 아버지였다. 세 살에 피아노를 배우고, 네 살에 1/16 크기의 작은 바이올린을 손에 쥐었다. 가족 전체가 한 명의 예술가를 위해 올인한 셈이다. 세계적 천재는 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성공 뒤에는 반드시 한 가족의 희생이 있다.
 
박수는 무대 위에서 울리지만, 그 박수를 가능하게 한 시간은 늘 집 안에서 시작된다.
장한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늘 겸손했다. 화려한 무대 위에서도 자신을 “아직 배우는 사람”이라 말했다. 진짜 거장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연주자에 머물지 않았다. 후배를 키우고, 클래식을 대중에게 돌려주려 했다. 특히 2011년 이재명 대통령이 성남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성남아트센터 공연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클래식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는 단순한 스타 연주자가 아니라, 클래식이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 문화교육자였다.
 
그렇기에 지금 예술의전당에 필요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예술의전당은 더 이상 클래식 애호가들만의 성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K컬처의 본산이 되어야 한다. 클래식, 오페라, 발레는 물론이고 영화, AI아트, 게임음악, 디지털 퍼포먼스, 글로벌 협업까지 아우르는 살아 있는 플랫폼이어야 한다.
 
세계 최고의 공연장은 좋은 공연장이 아니라, 세계가 먼저 찾아오는 장소다. 미국의 Lincoln Center, 일본의 산토리홀, 중국의 국가대극원과 경쟁하려면 단순한 시설 비교로는 안 된다. 서울만의 이야기, 한국만의 감성, K컬처만의 힘이 필요하다.
 
광화문이 BTS의 무대가 되고, 경복궁이 세계인의 배경이 되듯, 예술의전당 역시 세계가 찾아오는 문화 성지가 되어야 한다. 공연을 보러 오는 곳이 아니라, 한국 문화의 미래를 체험하러 오는 곳이어야 한다.
 
AI 시대의 문화는 ‘감상’이 아니라 ‘참여’다. 관객은 더 이상 수동적 소비자가 아니다. 직접 연결되고, 공유하고, 재창조한다.
 
예술의전당도 이제 공연장 운영을 넘어 디지털 플랫폼, 글로벌 스트리밍, 교육 콘텐츠, 문화기술 산업의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경쟁자로 본다는 것은 결국 예술의전당이 세계인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뜻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했다.
“大器晩成(대기만성).”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예술의전당도 그렇다. 오랜 시간 국가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진짜 세계적 플랫폼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적자는 숫자이지만, 비전은 시대를 바꾼다.
 
장한나의 취임은 사람 한 명의 인사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문화의 다음 30년을 묻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케이클래식의 완성은 장한나의 손으로 한다.
 
한국은 이미 K팝으로 세계를 흔들었다. K드라마와 K영화는 세계인의 감정을 사로잡았다. 이제 남은 마지막 정점은 K클래식이다. 가장 오래된 예술, 가장 깊은 예술, 가장 높은 예술의 영역에서 한국이 세계의 기준이 되는 일이다.
그 완성의 지휘봉이 지금 장한나의 손에 들려 있다.
 
그가 예술의전당을 바꾸는 것은 단지 한 기관의 흑자 전환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문화의 격을 다시 쓰는 일이다.
넷플릭스를 넘어, 유튜브를 넘어, 세계가 서울의 예술의전당을 바라보는 날.그날 우리는 비로소 말하게 될 것이다.
 
"K-클래식의 완성은, 장한나의 손으로 이루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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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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