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JP 데스크 칼럼] 비유는 쉽고, 구조는 어렵다: 이코노미스트의 한국 읽기 오류

밖에서 보면 큰 그림이 보인다. 그러나 모든 외부의 시선이 곧 통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숲을 본다는 이유로 나무의 결을 놓치기도 하고,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잣대로 착각하기도 한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외부의 경고는 분명 적절했다.  하지만 그 경험이 오늘의 한국 경제를 해석하는 만능의 프레임이 될 수는 없다.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The Economist 는 한국의 인공지능(AI) 산업정책이 중동발 에너지 충격과 충돌하고 있으며, 그 구조가 1970년대 석유파동과 닮아 있다고 진단했다. 익숙한 서사다. 권위주의 시절의 산업정책, 높은 에너지 의존도, 국가 주도의 대규모 투자. 이 세 가지를 나란히 놓으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결론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자연스러움에 있다. 경제는 이야기로 설명될 수 있지만, 정책은 구조로 평가되어야 한다. 사실을 나열하는 것과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번 분석은 전자에는 충실하지만, 후자에서는 중요한 층위를 건너뛰고 있다. 

무엇보다 1970년대와 현재를 잇는 비교는 겉모습만 닮았을 뿐, 그 안의 구조는 전혀 다르다. 당시 한국은 외환 여력이 취약한 개발도상국이었고, 에너지 가격 급등은 곧 산업 중단과 국가 신용의 붕괴로 직결됐다. 반면 오늘의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에, 수천억 달러의 외환보유액과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핵심적 위치를 확보한 산업국가다. 같은 ‘에너지 충격’이라는 단어를 쓰더라도,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과 파급 경로는 전혀 다르다. 단일 변수로 두 시기를 연결하는 것은 분석이라기보다 비유에 가깝다. 

에너지 충격의 성격 자체도 달라졌다. 1970년대의 오일쇼크가 원유 가격이라는 단일 축을 중심으로 산업 전반을 직접 흔들었다면, 지금의 충격은 에너지, 원자재, 물류, 지정학이 얽힌 다층적 구조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AI 산업 역시 단일 에너지 집약 산업이 아니다. 전력과 소재, 인재와 자본, 그리고 설계 역량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산업이다. 헬륨이나 브롬과 같은 특정 소재에 대한 의존이 리스크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산업 전체를 멈추게 하는 결정적 변수로 작동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지금의 충격은 중단이 아니라 비용 상승과 조정의 문제에 가깝다. 
 

정책을 바라보는 프레임 역시 시대의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 주도의 산업정책이 시장을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는 오래된 경제학적 직관이다. 그러나 지금의 글로벌 환경은 그 전제를 흔들고 있다. 미국은 막대한 보조금으로 반도체 산업을 끌어들이고 있고, 유럽 역시 전략 산업 보호에 나서고 있으며, 중국은 이미 국가 주도의 기술 투자 체제를 구축했다. 기술 경쟁은 더 이상 기업 간 경쟁이 아니라 국가 간 정책 경쟁의 성격을 띤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한국의 ‘AI 고속도로’ 구상을 예외적 시도로 보는 것은 현실과 어긋난다. 오히려 이는 늦었지만 불가피한 선택에 가깝다. 
 

재정 부담에 대한 지적도 같은 맥락에서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 미래 산업을 둘러싼 경쟁에서 재정의 역할은 확대될 수밖에 없고, 이는 특정 국가의 취약성이라기보다 공통된 조건이다. 중요한 것은 지출의 규모가 아니라 방향과 지속 가능성이다. 그 점에서 한국의 정책은 단순한 경기 부양이 아니라 금융 구조를 산업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시도와 맞물려 있다. 주택으로 쏠린 자금을 생산적 투자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은 위험을 수반하지만, 동시에 구조적 문제를 겨냥한 접근이기도 하다.

박정희 시대와의 비교 또한 신중해야 한다.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정책의 속도가 빠를 수 있었지만, 그 대가는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왔다. 오늘의 민주주의 체제는 분명 더 많은 갈등과 조정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비효율이 아니라 제도적 안정성을 구성하는 요소다. 정책이 늦어질 수는 있어도, 그만큼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이는 단기적 속도와 교환되는 장기적 신뢰다. 

무엇보다 이번 에너지 충격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에너지 비용 상승과 공급망 불안은 AI 산업을 국가 전략으로 삼고 있는 모든 나라가 동시에 마주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이를 특정 국가의 정책 한계로 수렴시키는 것은 분석의 초점을 좁히는 결과를 낳는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와 기술, 지정학이 교차하는 새로운 산업 질서의 형성 과정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기적 충격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충격을 흡수하고 재배치하는 능력이다. 한국의 AI 산업정책은 단일 변수에 의해 흔들리는 구조가 아니라, 에너지와 금융, 산업과 기술이 결합된 복합 전략 위에 놓여 있다. 지금의 긴장은 실패의 징후라기보다 조정의 과정에 가깝다. 

외부의 시선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 시선이 과거의 프레임에 머무를 때, 그것은 통찰이 아니라 지연된 이해가 된다. 오늘의 한국 경제를 읽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비유가 아니라, 더 정밀한 구조에 대한 인식이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13일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반도체 패키징 소재PCB기판 생산 기업인 대덕전자를 방문 현장을 둘러보고 중동 전쟁으로 수급 우려가 있는 품목 생산 현장을 방문해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정부 추진 현황을 공유했다 2026413 공동취재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13일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반도체 패키징 소재(PCB기판) 생산 기업인 대덕전자를 방문, 현장을 둘러보고 중동 전쟁으로 수급 우려가 있는 품목 생산 현장을 방문해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정부 추진 현황을 공유했다. 2026.4.13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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