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두 번의 도약을 통해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창업주 이병철회장은 산업을 창조했고, 이건희회장은 조직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그 결과 삼성은 단순한 기업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존재가 됐다. 이병철 회장은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 낸 창조형 기업가정신, 이건희 회장은 회사를 근본적으로 바꾼 혁신형 기업가정신을 실천했다.
이재용회장이 마주한 시대는 전혀 다르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보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지가 더 중요한 시대다. 지속적으로 좋은 결정을 내리는 시스템형 기업가정신을 보여줘야 한다.
지금의 글로벌 환경은 협력보다 경쟁이, 규칙보다 충돌이 앞서는 국면이다. 공급망은 정치화됐고, 기술은 블록화됐다. 미국과 중국은 기술을 중심으로 사실상의 경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 인공지능(AI)이라는 전환적 기술이 등장하면서 산업의 규칙 자체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 과거의 성공 공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환경이다.
이러한 시대에는 기업가정신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빠른 판단과 과감한 투자가 경쟁력을 좌우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오늘날 기업가정신의 핵심은 판단의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을 조직적으로 실행하며,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구조를 설계하는 데 있다. 즉, 개인의 결단을 넘어 조직의 시스템으로 기업가정신이 이동하고 있다.
이재용 회장의 지난 5년은 경영의 시간이기보다 감당의 시간에 가까웠다. 상속세 부담, 사법 리스크, 지배구조 문제 등 과거의 과제가 경영 전반을 제약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삼성은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조직적 체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체력을 미래로 연결하는 방향 설정이다.
이재용 체제는 ‘버티는 리더십’에서 ‘설계하는 리더십’으로 전환해야 한다. 개인의 직관과 결단에 의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조직이 반복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 과제다.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특정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삼성은 지금까지 기술 기업으로 성장해 왔다. 더 빠르고, 더 작고, 더 많이 만드는 능력이 경쟁력이었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기술 자체의 우위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기술은 빠르게 확산되고, 경쟁자들은 예상보다 빠르게 격차를 좁힌다. 이제 경쟁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선택이다. 어디에 자원을 배분하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능력이 기업의 미래를 좌우한다.
이 지점에서 삼성은 ‘기술 기업’에서 ‘판단 기업’으로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그리고 이 전환은 선언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시스템으로 구현돼야 한다.
우선, 투자와 철수의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 AI, 반도체, 바이오, 전장, 로보틱스 등 모든 분야가 중요해 보이는 시기일수록 기준 없는 확장은 위험하다. 삼성은 장기적인 산업 지배력, 글로벌 경쟁 가능성, 국가 전략과의 연계성 등을 기준으로 투자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기업가정신은 순간의 용기가 아니라, 일관된 기준에서 출발한다.
또한 실패를 조직 자산으로 축적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한국 기업은 여전히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문화가 강하다. 그러나 AI 시대에서 실패는 중요한 데이터다. 실패한 투자와 잘못된 판단을 기록하고 공유할 때 조직은 학습한다. 실패를 숨기는 기업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실패를 축적하는 기업은 점점 더 정확한 결정을 내린다.
아울러 사내 기업가정신을 제도화해야 한다. 모든 판단을 오너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는 방식은 복잡성이 커진 시대에는 한계를 드러낸다. 내부 경쟁 구조, 독립적인 실험 조직, 실패에 대한 관용이 결합될 때 조직은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인다. 오너의 역할은 결정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이 작동하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전략적 포지셔닝 역시 분명해야 한다. 현재 AI 생태계는 미국이 데이터와 플랫폼을, 중국이 시장과 속도를 주도하고 있다. 이 사이에서 삼성은 독자적인 강점을 갖고 있다. 반도체, 제조, 그리고 글로벌 공급망이다. 이 세 가지를 연결하면 삼성은 단순한 기술 기업을 넘어 AI 인프라를 구축하는 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현실을 작동시키는 기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너의 역할은 무엇인가. 결론은 분명하다. 시스템을 만들고, 그 시스템의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다. 전문경영인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설명하는 사람이고, 오너는 그 결정이 잘되든 잘못되든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다. 이 원칙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판단이 분산될수록 책임의 중심은 더욱 중요해진다.
‘뉴 삼성’은 더 이상 조직 개편이나 신사업 몇 개로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제 그것은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된다. 삼성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고, 그 판단의 책임을 어떻게 구조화한 기업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어떤 전략도 지속될 수 없다.
이재용은 세 번째 삼성의 리더다. 창업과 혁신의 시대를 지나, 이제 삼성은 구조와 기준의 시대로 들어섰다. 기업가정신 역시 개인의 결단에서 조직의 시스템으로 이동하고 있다.
상속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분명하다. 삼성은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고, 그 결정의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것이 곧 이재용 시대 기업가정신의 본질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르포] 중력 6배에 짓눌려 기절 직전…전투기 조종사 비행환경 적응훈련(영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02/29/20240229181518601151_258_16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