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훈의 AI 돋보기] AI 기업 첫 고객, 민간 아닌 공공이 맡는다

  • 우수·혁신제품 심사에 AI 평가 기준 신설 추진

  • 납품실적 완화·신인도 우대…초기 기업 진입 문턱 낮춘다

  • 공공조달 확대에 검증·문서화 수요도 커진다

챗GPT로 생성한 이미지
챗GPT로 생성한 이미지
인공지능(AI) 기업의 성장 경로가 바뀌고 있다. 민간 대기업 한 곳을 뚫어 첫 납품 사례를 만드는 방식에서, 공공조달 시장에 먼저 들어가 초기 매출과 실증 이력을 쌓는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정부가 AI 산업을 지원금이 아니라 ‘첫 구매’로 키우겠다고 방향을 잡으면서다.
 
27일 조달청에 따르면, AI 제품에 대한 별도 혁신제품 평가 기준을 신설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AI 제품의 공공조달 진입 경로를 넓히기 위한 조치다. 앞서 이달 초에는 연간 225조원 규모 공공조달시장을 활용해 AI 산업 초기 수요를 키우겠다는 방침도 내놨다. 단순한 기술 개발 지원을 넘어 정부가 AI 기업의 첫 고객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핵심은 공공시장 진입 문턱을 낮춘 점이다. 조달청은 나라장터 종합쇼핑몰(MAS)에서 AI 기반 상용 소프트웨어의 경우 납품실적 요건을 완화하거나 면제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서류 부담을 줄이고 적격심사상 신인도 우대도 검토하고 있다. 기술은 있어도 납품 이력이 없어 공공시장에 들어가지 못하던 초기 AI 기업에겐 진입 문턱이 낮아지는 변화다.
 
이 대목이 중요한 이유는 명확하다. AI 기업에 가장 부족한 것은 기술보다도 초기 매출과 실증 이력인 경우가 많다. 제품 성능을 입증해도 실제 구매처가 없으면 후속 투자와 민간 영업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반대로 공공기관 납품 이력이 생기면 제품 안정성, 운영 경험, 보안 대응 능력을 한 번에 증명할 수 있다. 공공조달이 단순 매출처를 넘어 영업에 활용할 수 있는 실적 사례가 되는 구조다.
 
실제 예산도 붙기 시작했다. 조달청은 올해 1차 혁신제품 시범구매 사업에서 전체 323억원 가운데 AI 제품에 약 79억원을 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순히 정책을 제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구매 예산이 실제로 집행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수혜 기업도 나타나고 있다. 코난테크놀로지는 생성형 AI 모델을 탑재한 업무용 제품을 조달청 나라장터 종합쇼핑몰에 등록한 뒤 한국도로공사와 한국전력거래소, 부산대 산학협력단 등에 공급했다. 제이엘케이는 뇌졸중 AI 솔루션이 조달청 혁신제품으로 지정되며 공공의료기관 확산 기반을 확보했다. 네비웍스도 AI·확장현실(XR) 기반 통합 가상훈련 플랫폼이 혁신제품으로 지정되며 공공 훈련 시장 진입 기반을 마련했다. 공공조달 확대가 정책 방향에 그치지 않고 실제 도입 사례와 조달 진입 기반 확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사례를 보면 초기 수혜는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 기업에 먼저 집중되는 모습이다. 공공 현장에서 바로 도입할 수 있는 AI 소프트웨어는 설치와 운영 부담이 상대적으로 낮다. 문서 요약, 민원 응대, 영상 분석, 이상 탐지, 업무 자동화형 등이 해당 영역에 포함된다. 발주기관 입장에서도 대규모 인프라 교체 없이 시범 도입이 가능하다. 초기 AI 기업이 공공시장에 먼저 안착할 경우 민간 도입 사례 확보 순서도 바뀔 수 있다.
 
동시에 시장은 더 까다로워진다. 조달청이 예고한 전문 심사체계의 본질은 ‘AI 제품을 더 쉽게 넣겠다’가 아니다. ‘진짜 AI인지, 공공이 사서 써도 되는 수준인지 더 엄격하게 보겠다’에 가깝다. 신뢰성, 모델 적합성, 실제 문제 해결력, 운영 가능성을 따로 따져보는 구조가 되면 단순 자동화 기능을 AI로 포장한 제품은 통과가 어려워질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새 시장도 열린다. AI 제품을 납품하려는 기업은 성능 검증 자료, 데이터 처리 체계, 보안 대응, 오류 관리, 유지보수 계획을 더 정교하게 문서화해야 한다. 그만큼 검증, 감리, 인증, 문서화, 운영 컨설팅 수요가 함께 커질 가능성이 크다. AI 공공조달 확대가 곧바로 AI 검증 산업 확대와 연결될 수 있다는 의미다.
 
다만 한계도 있다. 공공조달은 민간 시장보다 의사결정이 느리고, 평가 기준이 구체화되기 전까진 기업 입장에서 준비 비용이 더 늘 수 있다. 발주기관이 실제로 어떤 AI를 우선 구매할지, 생성형 AI와 분석형 AI 가운데 어디에 수요가 몰릴지도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한다. 진입 문턱을 낮췄다고 해서 곧바로 대형 매출로 이어진다고 보긴 이르다.
 
그럼에도 방향은 분명하다. 국내 AI 산업의 첫 성장판이 민간 대기업 발주가 아니라 공공조달에서 열릴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이다. 지원금 중심 정책과 달리 조달은 실제 구매와 운영을 전제로 한다. AI 기업 입장에선 ‘개발 완료’보다 ‘공공에서 쓸 수 있는 제품’이 더 중요해지는 국면으로 들어섰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AI 기업 다수는 기술 개발 단계는 넘었지만 첫 대형 고객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왔다”며 “공공조달이 초기 실증과 첫 매출을 만들어주는 창구로 자리 잡으면 투자 유치와 민간 영업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는 AI를 만들었다는 사실보다 공공이 요구하는 신뢰성, 문서화, 운영 체계를 얼마나 갖췄는지가 실제 시장 진입을 가를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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