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스타인은 미성년자 성 착취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뒤 수감 중 사망했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히 정치와 경제, 학계를 뒤흔드는 그림자로 남아 있다. 권력의 높은 벽 뒤에서 이어진 교류와 유착 의혹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서구 사회 최고위 인사들이 잇달아 자리에서 물러나고 있다.
영국에서는 피터 만델슨 전 주미 대사가 정부 기밀 유출 의혹과 앱스타인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사임한 데 이어 상원 의원직까지 내려놓았다. 그의 임명을 강행했던 키어 스타머 총리에게도 책임론이 확산되며 지도부 교체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여기에 영국 왕실까지 파장이 번졌다. 앤드루 왕자 역시 앱스타인과의 지속적인 교류 및 관련 의혹으로 수사 대상에 오르며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이미 과거 성추문과 민사 합의로 공적 직무에서 배제된 바 있는 그가 또다시 사법 절차의 중심에 서면서, 이번 사태는 단순한 정치 스캔들을 넘어 영국 기득권 전반을 뒤흔드는 양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빌 게이츠도 공개 사과에 나섰다. 세계 최대 민간 자선단체를 이끄는 인물로서 쌓아온 혁신과 공헌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앱스타인과의 만남을 인정하며 “실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한마디로 신뢰의 균열이 봉합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글로벌 리더십은 도덕적 기준 위에서만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앱스타인 저주’가 서구를 강타한 이유는 단지 유명 인사가 범죄자와 만났기 때문이 아니다. 권력의 작동 방식과 윤리의 균열이 동시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동양 고전의 경구가 떠오른다. 근묵자흑(近墨者黑) —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
권력층이 서로를 과도하게 신뢰하고, 폐쇄적 네트워크 안에서 상대의 행위를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도덕적 경계는 흐려진다.
서구 엘리트 사회는 오랫동안 전문성과 성공, 영향력으로 자신을 정당화해왔다. 학계와 정치, 재계는 상호 검증보다는 인맥과 연줄 속에서 순환했다. 그 구조가 앱스타인이라는 위험 신호를 오히려 희석시킨 것이다.
게이츠가 인정했듯, “직접적 범죄 가담은 아니었다”는 논리는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대중을 설득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연루 사실 자체가 곧 평판의 손상이다. 권력과 명성은 선택적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
서구의 사례는 아시아에도 분명한 경고를 던진다. “권력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의심해야 할 관계는 과감히 끊어야 한다.”
그러나 교훈은 선언에 그쳐서는 안 된다. 제도와 구조로 이어져야 한다.
아시아 역시 권력과 자본, 학계와 정책 네트워크가 촘촘히 얽혀 있다. 한국만 보더라도 정·재계 인맥, 로펌과 관료, 기업 간의 회전문 인사, 재벌 중심 의사결정 구조는 이해 충돌과 도덕적 해이를 낳을 가능성을 안고 있다. 문제는 범죄 여부를 넘어서, 평판 리스크를 사전에 관리하는 감각과 시스템이 충분한가 하는 점이다.
소셜미디어 시대에는 정보의 확산 속도가 권력의 대응 속도를 앞선다. 한 장의 사진, 한 통의 이메일, 한 번의 비공개 만남이 수년 뒤 공개되며 경력을 송두리째 흔든다. 과거에는 “몰랐다”는 해명이 통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왜 그 관계를 유지했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된다.
앱스타인 사태의 본질은 한 범죄자의 일탈이 아니다.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엘리트 네트워크의 자기 합리화 구조다.
권력은 스스로를 통제하지 않으면 외부에 의해 통제된다. 투명성을 제도화하지 않으면 폭로가 제도를 대신한다.
신뢰를 선제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여론이 심판자가 된다.
고전은 오래전부터 이를 경고해왔다. “군자는 의를 생각하고, 소인은 이익을 생각한다(君子義以爲上).” 권력자가 관계를 선택할 때 기준은 사적 이익이 아니라 공공의 의(義)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앱스타인 사태는 잔혹하지만 명확한 교훈을 남긴다. 권력과 신뢰는 동전의 양면이다.
신뢰를 쌓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데는 하루면 충분하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는 영원한 거짓도, 영원한 비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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