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더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지켜낼 것인가.” 메이필드호텔 한식당은 늘 같은 질문에서 출발해왔다. 빠르게 바뀌는 미식의 유행 앞에서도 봉래헌과 낙원이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다.
충남 예산 직영 농장에서 길러낸 식재료와 직접 담근 17년 숙성 장, 그리고 손끝에 쌓인 시간의 기억까지…. 호텔 한식이라는 이름 아래 이 두 식당은 ‘오래 버틴 한 끼’로 가치를 증명해왔다. 그 중심에는 이금희 메이필드호텔 수석 조리장이 있었다.
지난 2일 오후 봉래헌에서 만난 이 조리장은 요리 철학과 두 업장에 대한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가 말하는 한식은 이미 완성된 결과라기보다 앞으로도 지켜가야 할 ‘원칙’에 가까웠다.
‘흑백요리사’ 제안, 망설였지만
이 조리장 얼굴이 처음부터 화면을 장악한 건 아니었다.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2에 출연한 그는 오히려 담담하게 경연에 임했다. 칼끝이 분주하게 오가는 서바이벌의 긴장 속에서도 표정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손은 자기 리듬을 잃지 않았다.그러다 시즌2 출연을 제안받았다. 이번에도 고민했다.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는 생각, 회사와 업장에 부담이 되지 않을지에 대한 걱정이 앞서 오랜 시간 망설였다.
그의 망설임을 없애준 건 뜻밖에도 ‘호텔’이었다. 두 번째 제안이 들어왔을 때 회사 내부에서는 “지금은 나가는 게 맞다”며 출연을 권유했다. 개인이 아니라 업장을 대표하는 자리라는 판단이 섰을 때 그는 결심했다. “그럼 한번 해보자.”
서바이벌 경언, 그저 ‘나답게’
촬영장에 들어선 이 조리장이 가장 크게 느낀 건 요리보다 ‘리듬’의 차이였다. 호텔 주방은 팀플레이다. 시간·온도·동선·위생·서비스의 완성도가 동시에 맞물려야 한다. 반면 서바이벌은 개인전의 속도다. 특히 젊은 참가자들은 말 그대로 사활을 걸고 뛰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서바이벌이 잘 안 맞아요.”
젊은 후배들처럼 치열하게 경쟁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답을 택했다. “이겨야 한다는 욕심은 내려놓고 수십 년 해왔던 음식을 깔끔하게 보여주기로 했죠.”
“떨고 있는 후배들을 보며 잡아줘야겠단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그는 이 프로그램을 ‘경쟁’보다 ‘후배를 키우는 자리’로 받아들였다. 화면에서 보인 그의 담담함은 무감각이 아니라 호텔 주방에서 오랜 시간 몸으로 익혀온 ‘기준’에 가까웠다.
“흑수저 셰프들은 사활을 걸고 뛰잖아요. 반면 백수저 셰프들은 이미 몸에 밴 걸 같은 자리에서 정리하는 쪽에 가까워요.” 이 조리장은 그 차이를 잠시 생각하다가 “노련미라고 해야 할까”라며 웃어 보였다.
‘화연’으로 이어진 방송의 기억
프로그램의 효과는 상당했다. 입소문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번졌다. 특히 방송에서 선보인 ‘밤죽’의 기억이 손님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게 그 밤죽이냐”고 묻는 손님이 늘었고 그 반응은 봉래헌의 겨울 시즌 코스 ‘화연(花宴)’으로 이어졌다.
당시 이 조리장은 공주 밤을 활용한 요리를 내야 했다. “블라인드 테스트였어요. 누구나 먹자마자 '밤'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어야 했죠.” 그래서 도출한 가장 직관적인 결론은 바로 밤죽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밤죽이 방송을 위해 새로 만든 음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봉래헌에서는 겨울마다 손님들이 따뜻하게 찾던 메뉴였고, 연회·웨딩 메뉴로도 파생돼 이미 검증된 맛이었다.
봉래헌은 이금희 조리장의 ‘흑백요리사’ 출연을 계기로 겨울 시즌 한정 코스 ‘화연’을 2월 27일까지 선보인다. ‘꽃처럼 빛나는 음식으로 차린 잔치상’을 뜻하는 이 코스는 봉래헌이 지켜온 전통 조리 방식에 겨울 제철 식재료를 더한 프리미엄 한식 정찬이다.
코스는 방송에서 선보인 ‘공주 밤죽’에서 시작한다. 공주 밤을 뭉근하게 삶아 밤과 찹쌀을 갈고, 세 번 이상 체에 내려 부드러운 질감과 자연스러운 단맛을 살렸다. 밤의 비율을 80% 이상으로 높여 겨울에 어울리는 밀도감을 완성했다는 설명이다.
‘화연’은 공주 밤죽을 시작으로 전복진구절, 잣겨자즙 화채, 새우산적, 밤 떡갈비 구이, 연잎밥과 된장조치, 디저트와 약도라지차로 이어진다. 메인 메뉴인 밤 떡갈비는 소고기를 직접 다져 인삼과 다진 밤, 꿀, 17년 숙성 씨간장으로 하루 숙성해 은근한 단맛과 고소함을 끌어냈다. 전분 사용을 줄이고 밤으로 결을 잡았다.
요리의 골격은 ‘장’이 세운다. 국물에는 맑은 간장을, 양념과 중심 메뉴에는 오래 숙성한 장으로 깊이를 더한다는 그의 원칙이 코스 전반에 반영돼 있다.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를 알면 맛이 더 오래 남는다”는 그의 말은 봉래헌이 ‘화제’를 ‘방식’으로 바꾸는 태도와도 겹친다. 같은 기간 봉래헌의 시그니처 코스 ‘금강’도 함께 운영한다.
봉래헌은 ‘분신’, 낙원은 ‘역사’
이금희 조리장이 봉래헌을 설명할 때 가장 강조한 말은 '분신 같은 곳'이다. 봉래헌 개관 당시부터 함께한 오픈 멤버로, 20여 년간 직영 농장의 제철 식재료와 직접 담근 장을 바탕으로 조리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충북 괴산 메주로 담근 된장과 2009년산 숙성간장을 씨간장으로 사용하는 전통 장 문화는 5성급 호텔 한식당 가운데서도 보기 드문 운영 방식이라고 호텔 측은 설명한다.
낙원은 그 결이 조금 다르다. 1984년 ‘낙원가든’에서 출발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공간으로, 3대가 함께 찾는 갈비 명가로 자리 잡았다. 대갈비, 평양냉면, 갈비탕, 불고기 등 고기 중심인 메뉴가 식당의 뚜렷한 성격을 만들었다. 이 조리장은 “예전에 오셨던 분들이 아들·딸 데리고 오셨다가 이제는 손주까지 데리고 오신다”고 했다. 공간이 바뀌어도 손님이 확인하는 건 결국 한 가지다. “맛은 변하지 않았구나.”
“어떤 분은 ‘친정엄마가 해준 그 맛 같다’며 울먹이시는데, 저도 그 순간 눈물이 나더라고요.”
대단한 미식의 수사보다 삶에서 길어 올린 한 문장이 더 오래 남는다. 그의 한식은 바로 그 말들로 평가받아온 시간이다. 그 시간이 가능한 이유는 분명하다. 메이필드 한식을 관통하는 원칙은 '사다 쓰지 않는다'로 요약된다. 예산 직영 농장에서 재배한 무·배추로 담근 김장, 오래 숙성한 장. 손님들이 “자극적이지 않고 속이 편하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닿아 있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채는 손님이 있고, 특히 연세 있는 손님은 깊이의 차이를 먼저 짚어낸다.
이 조리장은 국내 특급호텔 한식당 최초의 여성 총괄 조리장이라는 타이틀에 대해서도 우쭐해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함이 묻어났다. 이 조리장 스스로는 “오래 버틴 시간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다.
젊은 시절의 시행착오와 질책은 결국 기술과 태도로 남았다. 요즘 그가 가장 많이 말하는 건 ‘사람’이다. 빨리 떠나기보다 제대로 배우려는 직원들이 늘었다. “그런 후배 요리사들에겐 '잘할 수 있다'며 이끌어주는 것이 제 역할인 것 같아요.”
푸근하지만, 심지 있는 사람으로
“푸근하고 엄마 같은 사람인데, 그래도 심지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인터뷰 말미에 그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흑백요리사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그가 끝내 놓지 않았던 건 그 문장에 담긴 태도였다. 빠른 유행보다 오래 지켜온 기준, 사다 쓰지 않고 시간을 들여 만든 한 끼. 봉래헌과 낙원은 그 기준이 켜켜이 쌓여온 자리다.
그리고 이 조리장은 매일 아침 ‘흔들리지 않아야 할 맛’부터 점검한다. 봉래헌과 낙원이 지켜온 그 기준이 내일의 한 상에도 고스란히 닿도록 오늘도 주방에서 시간을 다시 세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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