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자의 영화 이야기③ | 인간·문화·자연] '왕과 사는 남자' 엄흥도와 한명회, 한 사람의 장례와 한 사람의 권력

역사는 권력을 기록하지만, 문명은 인간을 기억한다. 왕좌를 둘러싼 칙령과 교지는 사서에 남지만, 한 인간의 마지막을 ‘사람답게’ 지켜낸 손길은 세월을 넘어 공동체의 윤리로 되살아난다.
 
'왕과 사는 남자'가 우리에게 묻는 질문도 결국 여기에 닿아 있다. 권력의 정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본 사람과, 흙의 온도에서 인간을 붙든 사람. 한명회와 엄흥도는 그 대비의 양극이다.
 
역사 속 엄흥도는 영월의 호장이었다. 단종이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 뒤, 누구도 감히 시신을 거두지 못하던 그 밤에 그는 관과 장례 기구를 마련해 장사를 치렀다. 공포가 예(禮)를 압도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는 벼슬아치의 계산이 아니라 사람의 양심으로 움직였다. 왕위를 지킨 것이 아니라, 죽은 인간의 존엄을 지켰다. 장례를 마친 뒤 그는 벼슬을 내려놓고 가족과 함께 자취를 감추듯 떠났다고 전한다. 권력의 기록에서 사라졌으나, 인간의 기록 속에서는 오히려 또렷해졌다.
 
반대로 한명회는 세조의 즉위를 도운 핵심 훈구 대신으로, 생전에는 권세와 영화가 극에 달했다. 부귀가 하늘을 찔렀고 가문은 번영했다. 그러나 권력의 절정은 언제나 도덕적 질문을 남긴다. 사후 부관참시를 당한 그의 운명은 정치적 보복을 넘어선 역사적 상징이다. 권력은 한 시대를 장악할 수 있으나, 인간다움의 기준을 장악하지는 못한다는 냉엄한 증거다.
 
영화는 이 대비를 장면으로 증명한다. 엄흥도가 단종과 마지막 이별을 나누는 장면은 과장되지 않는다. 찬 바람이 스미는 밤, 횃불이 흔들리는 공간, 말보다 긴 침묵. 그는 왕이 아닌 한 청년의 죽음을 마주한다.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손을 모은다. 그 순간 영화는 정치의 언어를 지운다. 남는 것은 인간의 얼굴뿐이다. 슬픔은 깊되 요란하지 않고, 충절은 무겁되 과시되지 않는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가장 단순한 태도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반면 한명회가 단종을 강등시키고 모욕하는 장면은 차갑다. 말은 정중하고 절차는 합법적이다. 그러나 그 말의 결은 날카롭다. 지위의 언어로 한 사람의 존재를 깎아내리고, 제도의 문장으로 인간의 존엄을 축소한다. 칼을 들지 않아도 사람을 베는 권력의 방식이다. 권력은 격식을 갖추지만, 인간다움은 격식을 넘어선다. 그 차이가 두 인물의 최종적 운명을 갈라놓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류가 오랫동안 되풀이해 온 가르침을 떠올리게 된다. 성경은 묻는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태복음 16장 26절). 세속의 영화와 권세가 인간의 영혼을 대신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또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한다. 권력의 절정조차 영원의 관점에서는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찰이다.
 
불경 또한 인간을 중심에 둔다. 법구경은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니, 마음이 깨끗하면 복이 따른다”고 가르친다. 권력의 욕망은 외형을 키우지만, 자비의 마음은 인간을 완성한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권력은 결국 스스로를 해치고, 타인의 존엄을 지키는 행위는 세월을 넘어 빛난다.
 
우리 고유의 정신 역시 다르지 않다. 단군 이래 전해 내려오는 천부경에서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라 하였다. 인간 속에 하늘과 땅이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하늘의 뜻과 자연의 질서를 함께 품는 존재라는 선언이다.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는 일이 곧 천지를 받드는 일이라는 통찰이다. 권력의 높이가 아니라 인간의 깊이가 세상을 승화시킨다는 사상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엄흥도는 인중천지일의 길을 걸은 인물로 읽힌다. 그는 권력을 얻지 못했으나 인간을 잃지 않았다. 두려움 속에서도 예를 지켰고, 자연의 순리처럼 조용히 움직였다. 왕을 살리지는 못했으나 인간의 마지막을 살려냈다. 그래서 수백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의 이름을 따뜻하게 기억한다.
 
한명회의 삶은 권력의 교과서이면서 동시에 권력의 한계를 증명한다. 그는 시대를 움직였으나, 시대를 넘어선 평가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인류의 경전과 역사적 기억은 공통으로 말한다. 인간다움을 잃은 권력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왕과 사는 남자'는 묻는다. 우리는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권력의 높이인가, 인간의 깊이인가. 인간다움의 가장 끝은 하늘의 뜻과 자연의 질서를 함께 품는 자리다. 엄흥도는 그 길을 조용히 걸어간 사람이다.
 
역사는 승자를 기록하지만, 문명은 인간다운 자를 기린다. 그 단순한 진실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오래 붙잡게 한다.
 
왕과사는남자 영화 포스터
왕과사는남자 영화 포스터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댓글0
0 / 300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