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설 연휴 극장가의 풍경은 언제나 한국 사회의 집단 심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가족이 모이고, 세대가 뒤섞이며, 과거와 현재가 한자리에 앉는 시간. 올해 설 연휴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사극 ‘왕가 사는 남자’가 300만 관객을 돌파하고, 현대 첩보극 ‘휴민트’가 100만을 넘기며 2위에 오른 사실은 단순한 흥행 성적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두 작품은 시대도, 공간도, 장르도 전혀 다르다. 하나는 조선의 궁궐과 왕권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을 다루고, 다른 하나는 현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회색빛 항구와 첩보의 그림자를 무대로 삼는다. 그러나 공통점도 있다. 네 명의 주인공이 각기 다른 입장에서 사건을 끌어간다는 점이다.
다성적(多聲的) 서사가 오늘의 관객과 맞닿아 있다.
‘왕가 사는 남자’는 세조와 단종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중심에 세운다. 영화는 수양대군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진입하는 새벽 장면으로 시작한다. 안개가 낮게 깔린 경복궁 뜰, 북소리가 울리고, 젊은 단종은 아직 어린 군주의 얼굴로 정전의 문을 바라본다. 카메라는 그의 눈동자를 클로즈업한다. 두려움과 체념이 교차하는 그 눈빛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다. 이어 단종을 모셨던 충신의 모습이 비친다. 그는 피를 묻힌 채 무릎을 꿇고 “전하, 신은 끝까지 곁에 있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역사 교과서에서 한 줄로 지나가던 인물이 이 장면에서 생생한 인간으로 되살아난다. 세조의 측근은 또 다른 얼굴이다. 권력의 논리를 냉정하게 설파하며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는 명분을 내세운다. 네 인물은 선악의 단순 구도로 나뉘지 않는다. 권력의 정당성, 충의의 가치, 생존의 본능이 교차한다.
이 영화의 강점은 역사적 사실을 무리하게 비틀지 않으면서도,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파고든 데 있다. 세조가 홀로 어전에서 촛불을 바라보며 “내가 옳은가”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권력자의 고독을 드러낸다. 단종이 유배지에서 붓을 들어 시를 쓰는 장면은 무너진 왕권의 비애를 상징한다. 관객은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보다, 인간의 선택이 빚어내는 비극을 체감한다.
설 연휴 가족 관객에게 역사 서사는 세대 간 공통 화제가 된다. 조부모는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을 다시 확인하고, 젊은 세대는 새로운 해석을 접한다. 사극이 1위를 차지한 배경에는 이 같은 집단적 공감대가 있다.
반면 ‘휴민트’는 전혀 다른 결을 지닌다. 영화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항구에서 시작한다. 얼어붙은 바다 위로 안개가 피어오르고, 러시아어와 한국어, 북한 사투리가 뒤섞인 소리가 공기를 가른다. 국정원 과장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은 냉철한 표정으로 현지 공관을 드나든다.
조인성이 연기한 그는 정보의 파편을 조합하며 “사람을 통해 얻는 정보, 그것이 진짜 힘”이라고 말한다. 북한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인물은 이중적 삶을 산다. 낮에는 미소를 짓고 서빙을 하지만, 밤에는 북한 국가보위부의 연락을 받는다. 오랜 연인과의 재회 장면에서 그는 흔들린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들의 대화 속에 스민다.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는 외교의 언어로 사건을 관리하려 하지만, 결국 개인적 선택의 기로에 선다.
‘휴민트’의 장점은 현장감이다. 항구의 바람 소리, 어둠 속에서 오가는 암호, 술집에서 짧게 스치는 시선까지 세밀하게 묘사된다. 네 인물은 각자의 목적과 충성을 지니고 얽힌다. 총성이 울리는 추격 장면보다, 서로를 의심하며 눈빛을 교환하는 정적의 장면이 더 긴장감을 낳는다. 현대 첩보전은 선악의 구도가 모호하다. 정보의 세계는 회색이다. 관객은 인물의 선택이 가져올 파장을 끝까지 지켜본다.
그렇다면 왜 ‘왕가 사는 남자’가 1위, ‘휴민트’가 2위인가.
첫째, 설 연휴라는 시기적 요인이 크다. 가족 단위 관객은 비교적 정통 사극을 선호한다. 역사 서사는 폭력의 수위가 상대적으로 절제되어 있고, 세대 간 관람 장벽이 낮다. 둘째, 조선 왕조라는 보편적 소재는 한국 관객에게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새롭다. 세조와 단종이라는 인물은 교과서 속 존재지만, 영화는 인간의 갈등으로 재해석했다. 셋째, ‘휴민트’는 장르적 완성도가 높지만, 첩보물 특유의 긴장과 정치적 맥락이 일부 관객에게는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라는 해외 공간은 이국적 매력을 주지만, 동시에 정서적 거리감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두 영화 모두 네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한 점은 공통된 성공 요인이다. 단일 영웅이 아닌, 복수의 시선을 통해 사건을 바라보는 구조는 현대 관객의 인식과 맞닿는다. 사회는 더 이상 흑백으로 나뉘지 않는다. 각자의 입장과 이해가 얽혀 있다. ‘왕가 사는 남자’의 궁궐과 ‘휴민트’의 항구는 서로 다른 공간이지만, 인간의 선택이라는 공통 주제를 공유한다.
결국 흥행은 시대의 정서를 반영한다. 역사 속 권력의 비극을 통해 현재를 돌아보려는 관객, 국제 정세 속에서 개인의 운명을 묻는 관객이 동시에 존재한다.
1위와 2위의 차이는 장르의 우열이 아니라, 시기와 정서의 결합에서 비롯된다. 설 연휴 극장가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조선의 궁궐과 블라디보스토크의 항구가 한 스크린 위에서 경쟁했지만, 두 영화는 모두 관객에게 질문을 던졌다.
권력은 무엇인가, 충성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그리고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흥행의 숫자 너머에 남는 것은 이 질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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