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희 칼럼)시장원리 핑계대는 금융의 기득권 지키기

  • '따뜻한 금융'으로 대전환을

서정희
서정희
시장원리 핑계대는 금융의 기득권 지키기··· ‘따뜻한 금융’으로 대전환을

서정희 / 논설고문


한국 금융은 지금 거대한 변곡점 앞에 서 있다. 시장은 이미 과거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는데도 금융만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낡은 ‘시장원리’의 성채 뒤에 숨어 혁신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 현실과 어긋난 시장원리
내년이면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펴낸 지 250년이 된다. 그러나 18세기 스미스가 전제했던 ‘다수의 경쟁자와 자유로운 시장 진입’이라는 시장 전제는 오늘날 현실과 거리가 멀다. 시장 모습이 바뀔 때마다 주력 이론이 케인지언, 신고전파 등으로 교체되며 경제학 교과서가 끊임없이 바뀌어 왔지만 여전히 현실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다. 자본의 거대화, 기술 진보가 가져온 자연독점과 플랫폼 독과점, 그리고 심화되는 양극화는 더 이상 교과서적 시장이 작동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다.
실제로 세계 각국은 산업정책·통상정책·거시정책의 기조를 재정비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워싱턴 컨센서스 같은 단순한 시장주의 구호는 이미 설득력을 잃었고 포용적 성장·산업정책·전략적 자원 배분은 특정 이념을 초월한 ‘새 표준(New Normal)’이 되었다. 말하자면 시장원리 자체가 재조정되고 있는 시대다.
그러나 한국 금융은 이 변화의 흐름과 유독 동떨어져 있다. 서민금융 확대나 벤처 투자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금융권에서는 “시장원리에 어긋난다”는 반발이 반복된다. 문제는 이 ‘시장원리’라는 주장이 실제 시장 현실과도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말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왜 모든 은행의 금리가 사실상 동일한가? 왜 신용도가 낮은 개인·자영업자는 중금리 상품조차 찾아보기 어렵고 결국 사금융으로 밀려나는가? 이는 시장원리이기보다 위험 선별 기능이 작동하지 않은 시장실패에 가깝다.
금융의 본령은 위험을 가려내고 자금을 생산성 높은 곳으로 보내는 데 있다. 하지만 한국 금융은 부동산 담보대출이라는 손쉬운 이익 모델에 고착되어 있다. 금융이 실물경제의 파트너가 아니라 부동산 레버리지의 배후 세력으로 변질된 셈이다.

■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 비판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오늘날의 냉소로 이어져 있다. “부자들에게는 사회주의, 가난한 사람에게는 자본주의”라는 비판이다. 국가 정책이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에게 더 많은 자원이 흘러가도록 기울고 있다는 좌파 정치경제학의 고전적 주장인데, 요즘 중도나 우파에서도 자주 입에 올리는 게 놀랍다
위기가 닥치면 금융권의 손실은 공적자금으로 메워지고, 부동산 대출은 4000조원을 상회하며 그 편중도가 GDP 대비 160%를 넘는 수준까지 확대되었다. 자영업자 폐업은 사상 처음으로 연간 100만명을 넘었지만 은행 이익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 모순적 현실을 어떻게 ‘시장원리의 승리’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미 세계적 전문가들-예컨대 아데어 터너 전 영국 금융감독청장-조차 부동산 중심 금융이 시스템 리스크의 주된 발화점이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한국 금융은 이 위험 지대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고 있으며, 이는 금융이 사회적 신뢰를 잃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 대전환의 핵심: 금융감독 개혁
한국 금융이 제 역할을 되찾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장 현실에 맞는 원칙을 마련하고 감독 체계를 전면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금융 선진국들의 공통된 교훈은 명확하다. “일류 감독이 일류 금융을 만든다.” 금융회사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감독의 질이다.
너무 흔한 말이지만 가장 시급한 과제는 감독규정을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금융회사가 새로운 서비스나 구조를 시도할 수 있는 공간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혁신이 가능하다. 또한 금융감독원의 권한이 지나치게 집중된 구조는 반드시 견제될 필요가 있다. 감독기관이 금융회사 위에 군림하는 현실에서는 생산적 금융이 뿌리내리기 어렵다. 징계 위주에서 컨설팅 위주로 감독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
금융회사 또한 과감한 체질 개혁 없이는 미래가 없다. 부동산 중심 영업, 구조화된 위험 회피 전략으로는 시장 변화 속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자본은 국경을 초월해 이동하고, 고객의 신뢰는 금융회사가 가진 유일한 자산이다.

■ 이재명 정부 금융개혁의 성공 조건
이재명 정부가 생산적 금융·자본시장 혁신·서민금융이라는 ‘세 개의 화살’을 중심으로 금융 대전환을 선언한 것은 시의적절하다. 일부 금융지주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컨대 금융지주별로 향후 5년간 80조~110조원을 생산적 금융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정도 움직임으로는 부족하다. 자산 규모 대비 투자 규모가 턱없이 부족하고, 400%였던 주식 보유 위험가중치(RWA)를 250%로 낮춰준 정부 정책의 부산물 성격이 짙다. 자발적 경영혁신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금융사들은 3년 장기 보유 기준을 더 완화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아직도 스스로 변하기를 힘들어 하는 관치금융 수준이다.
감독당국도 차제에 금융지주 중심의 경직된 감독에서 벗어나 업권별 유연성을 가미한 좀 더 전향적인 감독 지침을 검토해야 한다. 금융회사들이 먼저 스스로 체질 개선에 나서면 인센티브로 규제를 차등적으로 완화해 금융지주끼리 경쟁을 유도해볼 만하다. 내년 경영계획을 세우고 있는 금융사들이 정부의 생산적 금융 지침 앞에 ‘대외용 숫자 맞추기’-이른바 생색내기식 분식작업-에 몰두할지 혹은 실제 변화와 혁신을 이뤄낼지는 두고 볼 일이다.
‘따뜻한 금융’은 취약계층을 위한 선심정책이 아니다. 금융이 본래 수행해야 할 기능-위험 선별과 생산적 자금배분-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금융이 제자리를 찾으면 시장은 더 공정해지고 경제는 더 튼튼해진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국제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미국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매경TV·매경출판 대표, 매일경제신문 워싱턴 특파원, 논설위원 등 ▷서울대 경제학부 객원교수  ▷연우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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