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부산 사상공단의 오래된 산업지대의 중심에서, 글로벌 전력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할 중대한 기술 혁신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다. 다각적 진단과 실질적 대응책 마련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아주경제는 지역 기업인과 정책결정자를 비롯해 학계·경제계 전문가, 청년 기술인을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고자 한다. 현장의 통찰과 데이터 기반 분석을 토대로 복합적 문제의 구조를 면밀히 검토하고, 실천 가능한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 목표다.
보조금 없는 ‘자립형 R&D’로 세계 4번째 8인치 SiC 웨이퍼 개발에 성공한 중견기업 유니스(UNIS). 지역 산업의 패러다임 전환을 준비하는 부산시 미래전략보좌관 전성하 특보가 지난 26일 한 자리에 앉았다.
기술로 돌파구를 찾으려는 지역 기업과 이를 뒷받침하려는 부산시의 정책 논의가 치열하게 이뤄지는 현장에 아주경제가 함께했다.
8·12인치 SiC 웨이퍼, 글로벌도 넘지 못한 벽을 깼다
중견 화학·소재기업 유니스(UNIS). 국내 최초로 8인치 SiC(탄화규소) 웨이퍼 개발에 성공한 지역 기업이다. 특히 글로벌 선도 기업들조차 아직 본격 상용화하지 못한 12인치 웨이퍼 시제품 구현까지 속도를 내고 있다. 부산이 전통적인 소비·서비스 도시 이미지를 벗고, 전력반도체라는 고난도 제조 업종에서 새로운 거점으로 부각될 수 있는 가능성이 눈앞에 다가온 셈이다.전력반도체용 SiC 웨이퍼는 고온·고전압 환경에서도 안정적 전류 제어가 가능해 전기차, 방산, 우주항공 등 국가 전략 산업의 기초를 이루는 소재이자, 제작 난도가 극도로 높은 ‘다이아몬드를 키우는 기술’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분야에서 유니스가 미국 울프스피드와 중국 SICC, TankBlue에 이어 세계 4번째로 8인치 SiC 웨이퍼 양산 기술을 확보한 것은 국내는 물론 글로벌 공급망 전체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예외적인 성과다.
간담회에서 최철헌 유니스 대표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우리는 자본이 아니라 기술로 승부했다”는 대목이었다. 말 그대로 ‘보조금 제로’ 상황에서 시작한 R&D였다.
실제로 이 성과의 뒤에는 정부 R&D 보조금 한 푼 없이 300억원의 자체 투자, 장비 설계에서 설치, 공정 제어 시스템까지 외부 장비 업체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설계·제작·튜닝하는 방식을 택했다. 열 분포와 가스 흐름을 0.1 단위로 제어하는 공정 기술을 스스로 쌓아 올려, 기존 국가 연구 프로젝트들이 수차례 실패를 거듭하던 영역에서 3년 만에 8인치 웨이퍼 완성이라는 결과를 끌어냈다.
이 과정은 대기업과 공공기관이 주도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와는 궤가 다르다. 장기간 과제를 나눠 수행하는 운영 모델이 아니라, 실제 양산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중견 제조기업이 공정 하나하나를 현장에서 검증하며 축적한 기술력의 결과라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기술 개발 넘어, 시장 확장에 전사적 역량 결집
특히 유니스는 기술 개발뿐만 아니라 시장 확장 전략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이달 말 삼성전자 반도체팀이 유니스 생산라인을 직접 실사할 예정이며, 이는 국내 고품질 8인치 SiC 웨이퍼 공급처 부재로 인해 전력반도체 생산계획 재수립을 검토해온 삼성전자 입장에서도 중요한 변곡점이 될 전망이다. 유니스는 이번 실사가 사실상 최종 단계라며 연내 계약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
최 대표는 “이번 실사는 사실상 최종 단계에 해당한다”고 강조했다. 연내 공급 계약 체결에 대한 기대감도 숨기지 않았다. 국내 대표 반도체 기업과 부산 중견 제조기업 간 공급망 연결이 현실화될 경우, 유니스 입장에서는 글로벌 시장 진출의 ‘신뢰도 인증’을 동시에 확보하는 효과를, 부산시 입장에서는 지역 제조업 부활의 상징적 사례를 얻게 된다.
유니스의 시야는 전기차 전력반도체에만 머물지 않는다. 회사는 이미 AI 글라스(AR 안경) 분야로의 확장을 준비 중이다. SiC 렌즈는 AI 글라스 핵심 부품으로, 12인치 웨이퍼를 기반으로 할 경우 대량 생산과 상품화 속도를 동시에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게 회사의 판단이다.
시장성도 만만치 않다. AI 글라스 시장은 전기차용 전력반도체보다 잠재 규모가 크고, 관련 생태계가 본격 열릴 경우 매출 규모가 조 단위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유니스는 이미 국내 대기업과 관련 논의를 진행하는 동시에, 미국 메타(Meta) 등 해외 ICT 기업을 상대로도 기술 상담을 계획하고 있다. SiC 소재 기술을 ‘웨이퍼-렌즈-응용기기’로 확장하는 수직계열화 전략을 염두에 둔 행보다.
대학·출연연 중심 지원 구조 한계 노출
문제는 이 같은 기술적 성과를 뒷받침해야 할 제도·정책 환경이 아직 충분히 준비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최 대표는 간담회에서 “수조 원이 투입되는 정부 R&D 사업에 정작 실제 제조기업은 접근하기 어렵다”며 현행 지원 구조의 문제를 지적했다.대학·정부출연연구기관 중심으로 예산이 배분되는 구조, 특정 인맥·네트워크에 따라 사업이 편중되는 지원 관행, 과도하게 반복되는 서류 작업, 담당 공무원의 잦은 순환으로 인한 행정 연속성 부재 등이 대표적인 장애 요인으로 꼽혔다.
글로벌 박람회 CES 참가 과정에서 겪은 사례는 현장의 불신을 키웠다. 유니스는 부산시 전략 산업 기업임에도 시의 내부 우려를 이유로 소형 부스만 배정받았고, 이는 수년간 축적한 기술과 제품을 세계무대에서 검증받으려던 기업 입장에서 ‘행정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에 대해 부산시 미래전략보좌관 전성하 특보는 간담회에서 “유니스 같은 기업이야말로 부산 제조업 재도약을 이끌 앵커 기업”이라고 규정하며 “시 차원의 지원 체계를 전면 재점검하겠다”고 밝혔다.
전 특보는 우선 전력반도체를 부산의 핵심 미래 전략 산업으로 설정하고, 산업단지 인프라 개선과 세제 혜택, 공정·설비 투자에 대한 금융·행정 지원 등 제도적 기반을 정교하게 다듬겠다고 설명했다. 지역에 뿌리를 둔 제조기업이 중장기적으로 고용과 기술·설비 투자를 이어가는 만큼, ‘단기 이벤트형’ 지원이 아닌 장기 투자 관점의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는 인식도 공유됐다.
반도체 전문 인력 부족 문제도 핵심 과제로 언급됐다. 그는 “부산은 제조 인프라는 갖추고 있지만 반도체 전문 인력 풀은 상대적으로 얇다”며 “대학·특성화고·연구기관과 연계한 맞춤형 인력 양성 프로그램, 현장 실습과 채용을 연계하는 트랙을 서둘러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행정 시스템 혁신에 대한 구체적 방향도 제시됐다. 우선 시와 기업이 함께 중앙정부 R&D 사업을 기획·응모해, 선정 이후 바로 부산에서 실증 사업으로 연계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겠다는 복안이다. 매번 동일한 자료를 반복 제출해야 하는 비효율을 줄이기 위해, 전자문서 기반 ‘간편 갱신’ 시스템 도입도 추진하겠다고 했다.
더 나아가 부산 소재 기업 전반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전수조사 플랫폼’ 구축 계획도 공개했다. 기업이 설비·인력·기술 역량, 핵심 제품과 공정 정보를 제공하면, 시가 이를 토대로 맞춤형 지원과 사업 매칭을 해 주고, 정보를 성실히 제공한 기업에는 각종 지원제도에서 우선권을 부여하는 구조를 구상 중이다. 행정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실제로 성장 가능성이 높은 강소 제조기업에 정책 자원이 집중될 수 있는 장치를 만들겠다는 의도다.
이번 간담회는 기술 기반 중견기업을 지역 전략기업으로 규정해 집중 육성해야 한다는 과제와 함께, 행정의 속도와 전문성 확보, 지역 기업 데이터화, 인력 생태계 구축, R&D 지원 구조의 제조기업 중심 재편 등 부산 산업정책 전반의 개선 방향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자리였다.
유니스 사례는 부산이 소비 중심 도시 이미지를 벗고 기술 기반 제조 도시로 복귀할 수 있는 잠재력을 입증하는 상징적 사례로 평가된다.
유니스의 독자 개발과 부산시의 정책 전환 시도는 부산 전력반도체 산업이 새로운 성장축을 형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기술로 기반을 다져가는 기업과 이를 뒷받침하는 행정이 제대로 맞물릴 때, 부산은 인구 유출과 산업 공백이라는 이중의 부담을 뚫고 한국 제조업의 새로운 블루오션 후보지로 부상할 수 있다.
이번 간담회가 그 전환점의 시작으로 기록될 수 있을지, 이제 부산시의 실행력과 지속 의지가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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