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네 리뷰] '하얀 차를 탄 여자' 장르 외피를 넘어선 감정의 울림

"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남긴 말이다. 장소, 날씨, 몸 상태 등 하나하나가 모여 '분위기'를 만든다는 의미다. 영화도 마찬가지. 그날의 기분, 나의 경험이 영화의 '평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최씨네 리뷰'는 필자의 경험과 시각을 녹여 관객들에게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일상적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영화 하얀 차를 탄 여자 스틸컷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 '하얀 차를 탄 여자' 스틸컷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트라우마는 조용히 남는다. 시간은 흘러도 그날의 냄새와 온도는 몸 어딘가에 새겨져 반복 재생된다. 어떤 기억은 너무 선명해서 고통이 되고 어떤 기억은 너무 흐릿해서 진실을 가린다. 우리는 그 모호함 속에서 타인을 오해하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고혜진 감독의 '하얀 차를 탄 여자'는 그 기억의 불완전함에서 출발한다. 상처를 마주한 세 여성이 서로의 그림자를 비추며, 결국 타인을 구원하는 일이 곧 자신을 구원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폭설이 휘몰아친 새벽, 피투성이가 된 은서(김정민)를 싣고 병원에 온 도경(정려원)은 그녀를 언니라 부르며 살려달라 애원한다. 곧이어 현장에 도착한 경찰 현주(이정은)는 도경의 혼란스러운 진술 속에서 감춰진 무언가를 직감한다. 하지만 진술과 시선은 서로 엇갈리고, 사건은 점점 더 복잡한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하얀 차를 탄 여자'는 고혜진 감독의 스크린 데뷔작이다. 그는 여성 서사를 중심에 두되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로 머물지 않도록 시선을 확장한다. 각 인물이 품은 트라우마는 서로를 향한 구원의 동력으로 작용하고 타인을 구원하는 행위가 곧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이 같은 구조는 영화의 초반과 후반을 잇는 정서적 고리를 만들어낸다. 고 감독은 트라우마를 상처가 아닌 '관계의 시작점'으로 바라보며 인간이 상처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차분히 그려낸다.
영화 하얀 차를 탄 여자 스틸컷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 '하얀 차를 탄 여자' 스틸컷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스크린 데뷔작인 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다소 과밀하다는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트라우마와 구원, 진실과 오해, 여성 연대의 서사까지 한데 엮으려는 시도는 흥미롭지만 감정의 밀도가 과해져 서사적 호흡이 고르지 않다. 다만 그 과잉이 미숙함보다 진심에 가깝게 느껴지도록 감정의 흐름을 솔직하게 밀어붙였다는 점은 장점이다. 

같은 사건을 각자의 시선으로 반복해 보여주는 형식 탓에 리듬이 늘어지는 구간도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장면이 변주로 재현될 때의 긴장감이 초반만큼 강하지 않고 설명적 대사가 여백의 긴장감을 덜어내기도 한다. 

정려원과 이정은의 연기 호흡은 영화의 중심을 단단히 붙잡는다. 정려원은 기억의 파편 속에서 진실을 좇는 도경의 불안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생기를 잃은 시선, 두려움이 번지는 표정, 끝내 맞이하는 해방의 얼굴까지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해냈다. 특히 영화 말미 정려원이 만들어내는 '해방의 감정'은 억눌러왔던 고통과 죄책감이 한순간 터져 나오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극장을 나선 뒤에도 정려원의 몇몇 얼굴이 잔상을 남긴다. 

이정은은 냉정한 수사자이자 동시에 인간적인 온도를 지닌 인물로 극의 균형을 이끈다. 집요하게 사건의 진실을 좇으면서도 감정의 경계를 넘지 않는 절제된 연기로 혼란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현주'의 존재감을 완성한다.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호흡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다소 성긴 서사를 감정의 밀도로 단단히 메운다.
영화 하얀 차를 탄 여자 스틸컷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 '하얀 차를 탄 여자' 스틸컷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서툴고 성긴 부분이 있더라도 '하얀 차를 탄 여자'는 응원하고 싶은 영화다. 타인을 구원하는 행위가 결국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과정이라는 메시지는 장르의 외피를 넘어선 울림을 남긴다. 여성의 시선으로 트라우마를 다루고 불완전한 기억과 편견 속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포착한다. 29일 개봉. 러닝타임은 108분이고 관람 등급은 15세이상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댓글0
0 / 300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