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연의 타임캡슐] '루터를 보호하라' …종교개혁 살린 제후의 '비밀납치'

  • 비텐베르크 대학 설립자 프리드리히 3세 …종교개혁의 위대한 조연

·황승연
[황승연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마르틴 루터의 위대한 여정 ④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처음부터 거창하게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다. 전 유럽을 뒤흔들어 놓으리라 의도했던 것도 아니고 예상한 것도 아니다. 비텐베르크 성교회(Schlosskirche Wittenberg) 대문에 대자보를 붙이는 것은 자주 발생하는 일이었으므로 루터가 95개 조로 구성된 반박문을 붙인 것이 즉시 주목받은 것은 아니다. 또 라틴어로 썼기 때문에 교수나 수사들만 읽을 수 있어서 그 파급이 즉시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어로 번역된 인쇄본이 퍼져나가 평신도들이 읽을 수 있게 된 이듬해 초가 되어서 대중적인 반향이 시작되었다. 이런 비슷한 일은 100년 전에 체코에서 얀 후스(Jan Hus 1372? ~ 1415)나 150년 전 영국의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도 시도했던 일이다. 그러나 루터 이전에 일어났던 유사한 사건들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루터는 운이 좋았다. 루터를 정치적으로 보호해 준 권력자가 있었고, 대학엔 사상적 동지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주장을 빠르게 확산시키는 인쇄술의 발달이 그의 운을 시대의 개혁에 도달하게 했다.
 
그가 쓴 반박문은 학자와 성직자를 중심으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다, 독일어 번역본이 나오자 빠르게 퍼져나갔다. 나중에는 유럽 전체로 퍼져 대부분 사람이 알고 관심을 가질 정도의 큰 불길로 타올랐다. 당연히 인근의 대주교와 교황청에도 보고가 되었다. 교황청은 분노했고 루터는 결국 재판을 받게 된다. 독일의 중부지방에 있는 작은 도시 보름스(Worms)에서 열린 제국의회의 재판이다. 100년 전 비슷한 주장을 했던 얀 후스는 신변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고도 콘스탄츠(Konstanz)에서 열린 재판에 참석했다 거기서 화형을 당했다. 루터에게도 가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가면 죽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루터는 보름스행을 결정했다. 루터가 보름스로 가는 길에 많은 지지자가 그의 마지막 길을 환호로 배웅했다. 그의 생명과 안전을 가장 걱정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작센의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Weise, 1463~1525)’였다.
 
종교개혁의 산실 비텐베르크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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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대학의 설립자 프리드리히 3세의 초상]


 
현자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는 그의 재임 중에 늘 신중하고 정의로운 태도로 제후의 권리와 종교적 공정성을 지킨 인물로 후대에 평가받아 ‘현명한 제후’라는 별칭으로 불리었다. 1486년, 그가 23세 때 독일의 작센(Sachsen) 선제후로 즉위하였다. 선제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제후라는 뜻이다. 신성로마제국에는 일곱 명의 선제후가 있었는데 그도 유력한 황제 후보였으나 스스로 사퇴하면서 제국의 균형자 역할을 하려 했다.
 
프리드리히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49세가 되던 1502년에 그는 학문과 신학적 탐구를 장려하고자 비텐베르크 대학을 세웠다. 이는 그가 학문적 명예와 교육의 후원자로서 자부심이 드러나는 상징이었다. 루터가 신학 논쟁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교수로서 활동하게 된 비텐베르크 대학이 있어서 가능했다. 프리드리히는 대학에서의 학문적인 자유를 장려하고 루터가 제기한 문제들을 이단으로 단정하지 않고 토론의 기회를 보장하려 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는 신설 비텐베르크대학을 종교개혁의 지적 중심지이자 종교개혁 사상의 전파 기지로 만들었다. 루터가 95개 항의 반박문을 만들어 공개한 것도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면죄부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논쟁에 붙여보자는 학문적인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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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대학교 현재 모습] 
 

 
당시에는 이미 설립된 하이델베르크 대학(Heidelberg 1386년), 에어푸르트 대학(Erfurt 1379년), 라이프치히 대학(Leipzig 1409년) 등의 역사적인 대학들이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이 대학들과 견줄 수 있는 학문과 신학의 중심지를 자신의 영토에 세워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법률가, 신학자, 관료를 양성하려 하였다. 하지만 대학은 루터의 명성을 듣고 독일뿐 아니라 스칸디나비아나 동유럽에서도 유학생이 찾아오는 신학과 성서 연구의 명문 대학으로 더욱 이름을 날렸다. 그 후 루터파 제후와 도시들은 비텐베르크 출신의 신학자와 법률가들을 자국 교회의 개혁을 위해 초빙했고 비텐베르크대학은 루터교 신앙을 확산하는 인재 양성소 역할을 하였다. 이 대학엔 30명 정도의 교수진이 있었는데 특히 루터나 멜란히톤(Melanchton 1497~1560)의 강의는 학생뿐 아니라 주민과 외국 방문객까지 청강하는 큰 행사가 되곤 했다. 당시의 교수들은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연봉을 지급했고 학생들의 수업료도 교수들의 일부 수입이었다. 비텐베르크는 대학도시답게 인쇄술이 크게 발달했으며 교수들은 발달한 인쇄술 덕분에 인세나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루터의 은인 ‘현명한’ 프리드리히 3세
 
대학의 설립자 프리드리히가 루터와 개인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눈 기록은 없다. 루터의 신학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수용했다고 기록된 것도 없다. 그러나 루터가 교황이나 황제에 의해 부당하게 처리되지 않도록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내세워 루터를 여러 차례 지켜주었다. 루터의 사상을 지지했다기보다는 정치적, 법적 정의를 지키고 제후의 자율성과 독립성 보장 차원에서 루터를 보호한 것이었다. 중립적 입장에서 절차를 앞세워 루터를 보호함으로써 급진적 개혁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지 않고 그를 보호하여 종교개혁이 성공하도록 지혜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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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숨어지냈던 바르트부르크 성]

 
프리드리히는 1517년 루터가 95개 항의 반박문을 발표한 후 교황청과 황제에게서 파문과 체포의 위협을 받았는데 그를 체포하지 않고 비텐베르크에서 계속 활동하도록 허용했다. 또 1518년에 있었던 아우구스부르크 청문회에서 루터에 대한 소환 요구를 거부하고 공정한 재판을 요구함으로써 교황청의 압력에서 벗어나 루터가 체포되는 것을 막았다. 1520년 교황청은 루터에게 60일 이내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해 겨울, 교황의 교서와 함께 교황과 관련된 문서들을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소각했다. 이때도 프리드리히는 묵인했다. 1521년에 교황은 루터를 공식적으로 파문하자 따라서 제국 차원에서도 재판하게 된다. 이에 따라 루터는 보름스(Worms)에서 열린 제국회의에 참석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직접 심문을 받았다. 루터는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황제의 명령에 불복해, 결국 그에게 사형선고와도 같은 제국 추방령이 내려졌다. 이때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납치하여 그가 관리하던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에 숨겼다. 루터는 여기서 가명을 쓰면서 신분을 감추고 숨어지내면서 신약성경을 번역하였다. 루터 부재 중에 비텐베르크에서는 그의 동료 교수 칼슈타트(Karlstadt 1486~1541)가 주도한 성상 철거, 미사 파괴 등 폭력적 개혁 시도가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우려했고 루터가 돌아가 사태를 수습하길 원했다. 루터는 변장을 벗은 후,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비텐베르크로 귀환해 폭력적 개혁을 비판하며 개혁의 방향을 성경 중심, 비폭력 방식으로 되돌렸다. 프리드리히는 수도사들이 떠난 비텐베르크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루터가 사용하게 함으로써 결혼 후 루터가 안정적인 기반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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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성서를 번역하던 바르트부르크 성의 루터의 방]



 
종교개혁의 위대한 조연
 
프리드리히가 내린 정치적 결단의 수혜로 루터의 성공은 가능했다. 프리드리히는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기존 교회의 부패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한 개혁적 목소리를 허용하는 입장을 취했다. 1525년 그가 죽기 직전 개신교 방식으로 마지막 성만찬을 받았다 한다. 이는 루터의 사상에 공감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프리드리히라는 ‘현명하고’ 막강한 권력자의 보호가 없었으면 결코 루터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교황청의 파문과 황제의 추방령으로 위기에 빠져있던 루터를 정치적으로 보호함으로써 그가 단순한 수도사에서 교황과 제국을 상대로 한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변모할 수 있게 도왔다.
 
프리드리히의 대학 설립은 종교개혁뿐 아니라 오늘날 대학의 전통과 기초를 만들었다. 대학은 교육기관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정신을 태동시키는 무대가 되었다. 루터는 성경을 일상 독일어로 번역하여 확산시킴으로써 현대 독일어의 기초가 되었고 동료 멜란히톤은 인문주의적 교양교육을 강조하고 설계하여 ‘독일의 교사’라는 호칭을 받으며 대학 개혁을 주도했다. 오늘날 독일 대학의 ‘학문의 자유, 교양교육, 원전 연구 중심주의’는 비텐베르크대학에서 기원한다. 19세기 베를린에서 세워진 근대 대학의 효시라고 하는 훔볼트대학(1810년 설립)이 ‘연구와 교육의 자유’를 내세운 것은 비텐베르크가 그 모델이고 미국의 하버드대학교나 예일대학교 등도 비텐베르크의 전통을 모델로 삼았다. 프리드리히의 현명함은 종교를 억압의 도구에서 진리의 장으로, 대학을 특권의 집에서 자유의 전당으로 바꾸어 놓았다. 세계의 모든 대학이 그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 교수들도 잘 모른다. 현재의 개신교가 그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 기독교 신자들도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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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와 그를 도왔던 비텐베르크의 동지들]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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