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직장인들에게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회사가 주최하고 상사가 참석하는 술자리는 사실상 근무의 일환으로 여겨지며, 그 자리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보편적 상식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자발적 과음으로 인한 사고는 업무상 재해로 보기 어렵다”는 판결을 내리며 이런 상식을 뒤집었다.
사건은 2012년 한 중소기업 부서 회식에서 벌어졌다. 직원 김모씨는 1차 식당 술자리에서 동료들과 술을 마신 뒤, 2차로 노래방에 갔다. 이미 만취 상태였던 그는 화장실을 찾다 비상구 문을 열고 나갔다가 4층에서 추락해 큰 부상을 입었다. 김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청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소송으로 이어진 사건에서 1심 법원은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므로 산재로 인정하기 어렵다”며 공단의 손을 들어줬고, 2심은 “공식 회식 중 발생한 사고로 볼 수 있다”며 근로자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대법원은 2015년 11월 12일 선고한 2013두25276 판결에서 원심을 파기했다. 재판부는 “회식 참석 자체는 업무의 연장선상에 있을 수 있으나, 근로자가 스스로 과도하게 음주해 발생한 사고는 업무와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특히 상사가 술을 강제로 권유하지 않았다는 점, 다른 동료들과 달리 김씨가 현저히 과음한 상태였다는 점을 들어 산재 불인정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려면 사용자의 지배·관리하에 있는 행위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회식 자리가 공식 행사라 하더라도, 자율적으로 이동한 2차 자리에서의 과도한 음주는 그 범위를 벗어났다고 본 것이다. 결국 김씨의 사고는 회사 책임이 아닌 개인 책임으로 귀결됐다.
이 판결은 직장인들이 흔히 갖는 상식과 배치된다. 많은 근로자들은 “회식 중 사고는 당연히 산재”라고 믿지만, 법원은 회식의 강제성 여부, 음주 정도, 사고 경위 등을 세밀히 따진다. 스스로 과음했다면, 회사가 주최한 자리라도 산재 인정은 쉽지 않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판결이 회식 문화에 주는 메시지를 주목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회식 중 사고까지 책임지라는 요구를 일정 부분 덜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 반대로 노동계에서는 “회식 자체가 사실상 강제성을 띠는 경우가 많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실제로 일부 판례에서는 상사가 술을 반복적으로 권하거나, 퇴근 후 참석을 강요한 경우 산재가 인정된 사례도 있다.
2024년 서울행정법원에서는 업무 관련 회식 뒤 귀가 중 전기자전거 사고가 발생한 사건에서, 회사 지배관리 범위와 업무 연관성을 이유로 산재를 일부 인정한 판결을 선고한 바 있다. 이처럼 사안별 사실관계에 따라 산재 인정 폭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점점 강조되고 있다.
결국 이 사건은 회식과 업무의 경계선을 어디까지 봐야 하는지에 대한 법원의 태도를 보여준다. 법원은 음주 강요가 있었는지, 사용자의 지배·관리 범위에 있었는지를 핵심 기준으로 삼았다. 자발적 과음은 개인 책임, 강제된 음주는 산재 인정 가능성이 있다는 구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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